『경제학・철학 수고』(1844)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인간 감각을 어떻게 퇴행시키는지 이야기한다. 아름다움을 보는 안목과 예술을 즐기는 감각을 기르려면, 누구나 감각을 마비시키는 경제적 곤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선 부자든 가난하든 자기 감각을 단련할 틈을 내지 못한다.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프롤레타리아는 서서히 감각 능력을 빼앗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는 거리의 악취, 떠들썩한 소음, 눈을 가리는 희뿌연 먼지 등에 오랫동안 노출되고, 오랜 시간 공장에 갇혀 비좁은 공간에서 기계에 다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지낸다.
‘문명의 오물’ 속에 처박혀 사는 그들은 끝없이 해로운 자극에만 노출될 뿐 양질의 감각적 즐거움을 접하지 못하면서 자기 감각을 온전히 누릴 수 없게 된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자기 감각의 가능태를 온전히 실현하지 못한다. 품위를 잃은 채 오로지 노동에만 몰두하는 노동자는 “자신이 오로지 먹고 마시고 번식하는 최소한의 동물적 기능으로만 움직인다고 느끼는 법이다.”
자본주의는 부르주아 계급의 감각도 퇴행시킨다. 충분한 돈과 여유가 있기에, 부르주아들은 본래 의미 있는 감각을 추구할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충분히 자기 감각을 계발하지 못한다. 자본주의 사회가 우선하는 돈벌이를 위해, 즉 부의 축적과 증식을 위해서 감각의 즐거움을 포기한다.
“덜 먹고 덜 마시고 책을 덜 읽을수록, 극장과 무도회장과 술집에 덜 갈수록, 노래와 그림과 펜싱에 덜 심취할수록 자본을 더 많이 모을 것이다. 자본은 나방도 먼지도 먹어 치우지 못할 보물이다.” 그러나 이만한 부를 쌓기 위해서는 주어진 시간 대부분을 돈벌이에 쏟아부어야 한다. 감각적 즐거움을 거부하는 자기부정과 자기희생이 스크루지, 즉 부르주아 계급의 미덕이 된다.
마르크스는 말한다. “오감의 형성은 지금까지 세계사 전체가 이룩한 노작이다.” 우리 감각이 온전히 작동하려면 인류가 걸어온 역사와 문화의 정수를 자기화하는 경험이 필요하다. 그럴 만한 충분한 환경과 여유가 주어지지 못할 때, 우리 감각은 선조들보다 퇴행할 수도 있다. 감각이란 특정한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르게 단련된다.
수시마 수브라마니안, 『한없이 가까운 세계와의 포옹』, 조은영 옮김(동아시아, 2022), 25~26쪽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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