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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후한서

[뉴스 속 후한서] 이덕일의 고금통의 / 중앙일보




이덕일 씨의 《중앙일보》 연재 칼럼 「고금통의(古今通義)」는, 그 입장에 반드시 동의하는 바는 아니지만, 역사상의 크고 작은 일화들을 알아가는 재미로 자주 챙겨 읽고 있다. 그런데 2012년 4월 26일자에 『후한서』에 대한 언급이 실렸는데,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어 꼼꼼히 살펴보았다. 

『후한서(後漢書)』나 『삼국사기』 같은 국내외 사료들은 고구려가 후한(後漢)이나 위(魏)나라 같은 중국의 역대 왕조들과 내몽골에 있던 서안평을 차지하기 위해 여러 번 공격했다고 전해 준다. 고구려 개국 이념인 다물(多勿)이 중국 왕조들을 중원으로 내몰고 고조선의 옛 강토를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구려 태조왕은 서기 146년 서안평을 습격해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 처자를 사로잡아왔다. 대방과 낙랑이 황해도나 평안남도가 아니라 지금의 내몽골 파림좌기 부근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첫 번째 문장은 문장 논리가 조금 이상하다. 언뜻 보면, 마치 『후한서』가 서안평이 내몽골에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읽히는 까닭이다. 고구려가 서안평을 공격했다는 기록된 역사적 사실과 서안평이 내몽골에 있었다는 이덕일 씨의 의견이 하나로 엮여 둘 다 『후한서』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읽히는 문장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후한서』에는 서안평에 대한 기록이 모두 다섯 번 나오는데, 인용하고 거칠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1] 魏氏春秋曰:「遼東郡西安平縣北, 有小水南流入海, 句驪別種因名之小水貊. (『위씨춘추(魏氏春秋)』에 따르면, “요동군(遼東郡) 서안평현(西安平縣) 북쪽에 소수(小水)가 있는데,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구려의 갈래 종족이므로 그 이름을 소수맥(小水貊)이라 한다.”)

[2] 質、桓之間, 復犯遼東西安平,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 ([후한] 질제와 환제 연간에 다시 요동군 서안평현을 침범해 대방현령(帶方縣令)을 살해하고, 노략질하여 낙랑태수의 처와 자식을 사로잡았다.) 

[3] 郡國志西安平、帶方, 縣, 並屬遼東郡. (「군국지(郡國志)」에 따르면, 서안평(西安平)과 대방(帶方)은 현으로 모두 요동군(遼東郡)에 속한다).

[4] 遼東郡 秦置. 雒陽東北三千六百里. 十一城, 戶六萬四千一百五十八, 口八萬一千七百一十四. 襄平 新昌 無慮 望平 候城 安巿 平郭有鐵. 西安平 汶 番汗 沓氏. (요동군[진나라 때 설치되었다. 낙양 동북쪽 3,600리 거리에 있다. 11성에 호구는 64,158호이며, 인구는 81,714리이다.] 양평(襄平), 신창(新昌), 무려(無慮), 망평(望平), 후성(候城), 안시(安巿), 평곽유철(平郭有鐵), 서안평(西安平), 문(汶), 번한(番汗), 답지(沓氏) 현이 있다.

[5]  魏氏春秋曰:「縣北有小水, 南流入海, 句驪別種, 因名之小水貊.」(『위씨춘추(魏氏春秋)』에 따르면, “현 북쪽에 소수(小水)가 있는데,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구려의 갈래 종족이므로 그 이름을 소수맥(小水貊)이라 한다.”)

보다시피, [1]과 [5]는 같은 내용으로 장회태자 이현이 단 주에 나오는데, [1]은 본문 소수맥에 달린 주이고, [5]는 서안평에 달린 주이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 서안평현 북쪽에 소수라는 강이 있으며, 그 강은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점, (2) 이를 근거지로 삼고 살아가는 종족은 고구려의 갈래 종족으로 그 이름이 소수맥이라는 점이다. 서안평이 내몽골에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지는 않다. 만약 서안평이 내륙인 내몽골에 있다고 주장하려면, 그 북쪽에 있는 강이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가는 게 있(었)는지를 함께 증명해야 할 것이다.

[3]과 [4]는 각각 주석과 본문에 해당하지만 내용은 대동소이한데, 단지 서안평현이 요동군에 속한다는 사실을 가리킬 뿐이다. [3]에는 『후한서』「군국지」에 낙랑군의 속현으로 되어 있는 대방현이 요동군의 속현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왜 이런 차이가 생겼는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다. 

[2]는 고구려가 서안평을 도모하려고 공격해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와 자식을 잡아갔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다시'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가 서안평을 공격한 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점, 한4군에 해당하는 낙랑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점, 대방현령이 목숨을 잃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서안평현을 공격했는데, 대방현령이 죽고 낙랑태수의 처와 자식이 사로잡힌 기사의 해석을 두고 논란이 조금 있지만, 『후한서』 다른 곳에 강한 외적의 침입에 맞서 몇몇 주군의 군사들을 한데 모아 싸운 기록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 당시 고구려와 한나라의 최전선이었던 서안평을 방어하기 위해 근처에 있는 낙랑군의 병사들을 동원할 수도 있으므로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어쨌든 [1]~[5] 중 어느 경우를 살펴봐도, 『후한서』에는 서안평이 내몽골에 있다는 사실을 기록한 부분은 없다. 이덕일 씨가 인용한 『중국역사지도집』에 따르면, 요동군은 요하 동쪽에서 발해 연안을 따라 압록강에 걸쳐 있는 모습으로 나온다. 부여가 그 북쪽인 오늘날의 길림성, 흑룡강성 등의 만주 벌판에서 세력을 쥐었고, 고구려는 그 동쪽에서 세력을 성장하면서 이에 맞섰기 때문이다. 중국의 지배권이 내몽골까지 미친 것은 이덕일 씨 견해처럼 후한 무렵이 아니라 오히려 만주나 몽골의 민족들이 중국 본토에 왕조를 세운 이후에 있었던 일이다. 내가 알기로, 『중국역사지도집』은 당나라 이전에 중국은 내몽골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우리 민족의 역사를 살리려고 중국 스스로도 인정하지 않는 지배권을 몇백 년이나 거슬러 확대해 주거나 남의 땅인 몽골의 역사를 축소, 왜곡할 이유는 굳이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