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1980년대를 아냐’고 꾸짖었던 교수에게 돌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
나는 1980년대 초반엔 존재하지 않았고, 중후반에도 그저 생존하는 생물일 뿐이었으나, 그러므로 나는 1980년대를 몸으로 겪어내지 않았으나 그 시절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누구 못지않게 싸우고 있다고.
내 일생의 쟁투는 전부 내가 직접 체험하지 않았던 일들에 닿아 있고, 그것에 부끄러움도 부채 의식도 느끼지 않는다고.
왜냐하면 당신이 살았고 감각했던 1980년대는 당신에게는 지나가 버린 한 시절일 뿐이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자 탐구해야 할 대상이므로.
지금 탐구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당시의 당신에게보다 더 많은 자료가 주어져 있고, 조사와 검수를 통해 숨겨진 사실들이 밝혀진 바 있으며, 그러므로 나의 산문과 역사적 연대기로서의 산문이 일치하는 순간들이 더 많아졌다고. 개인사는 희미한 기억일지언정 나의 산문으로 재의미화되었다고.
― 박민정, 「타인의 역사, 나의 산문」, 『잊지 않음』(작가정신, 202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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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답니다.
이 책은 작가 박민정의 첫 산문집이다. 이렇게 길게, 자기 글을 되새기는 산문을 쓸 수 있는 체력이 부럽다.
2부 앞부분에 나오는 세 편의 글이 무척 흥미로웠다. 각각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초반에 관한 글이다.
1985년생인 작가가 압도적 경험으로 자신을 압박하는 이전 세대의 이야기 또는 자기 세대의 첫머리에 대해 어떻게 쓰고 말해야 하는가를 기록한 글이다.
강하고 멋있는 글이었다.
"나의 산문이란 언제나 내 육체가 거했던 당시에 완성되지 않았고, 내가 그것을 끊임없이 재의미화하며 성장해 갔을 때 어느 날 비로소 만들어졌다."
자기가 살았다고 그 시대의 의미를 독점할 수는 없다. 이야기는 끝없이 고쳐 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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