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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격정의 언어로 쓴 대한민국 철학사


유대칠의 『대한민국철학사』(이상북스, 2020)유대칠, 『대한민국철학사』(이상북스, 2020)


유대칠의 『대한민국철학사』(이상북스, 2020)는 뜨거운 글이다. 일종의 격문 형태로 쓰여진 느낌이 든다.  

이 책에서 저자는 승려의 철학인 고려의 철학, 양반의 철학이었던 조선의 철학에 이어서 대한민국의 철학을 정립하려는 뜻을 품는다. ‘너 자신을 알라’는 철학의 명령에 답하는 현재의 주체는 민중이다. 동학농민혁명과 3.1혁명의 주체로 “고난과 슬픔 속에서” 스스로를 반성하는 민중이다.  스스로를 철학 노동자로 칭하는 저자는 이 책으로써 민중들에게 먹일 ‘뜻’ 있는 철학을 생산하려 한다. 

유대칠에 따르면, 한국 철학은 ‘나’를 ‘희망의 시작’으로 놓는 철학이다. “민중의 철학은 ‘나’로부터 시작해 스스로 ‘나’로 돌아오는” 주체의 철학이면서 이 “‘나’가 ‘홀로 있음’의 ‘나’가 아니라 ‘더불어 있음’의 ‘나’”여야 한다. 함석헌의 말처럼, “사람의 살림은 본래 개개인으로 되는 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를 질문하되 나에 갇히지 않고 너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수용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의 철학은 민중의 언어, 즉 한글로 이루어져야 한다. 정약종이 서학을 받아들여 『주교요지』를 한글로 적었을 때, “한글은 사상의 언어”되었으며 이것이 “한국철학의 회임”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어서 최제우가 『용담유사』를 펴내 “민중의 언어로 이 땅 고유의 사상이 기록되고 읽히기 시작”하면서 “한국철학의 출산”이 이루어졌다. 이후에 류영모, 윤동주, 문익환, 장일순, 권정생, 함석헌으로 이러한 움직임이 이어지면서 한국철학은 성장했다. 

이 책은 조선 후기에서 시작해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철학의 씨앗부터 줄기까지를 장대하고 통쾌하게 훑어간다. 주자학의 한계를 인식한 일부 양반들이 사민평등 사상을 가진 양명학을 공부하고, 나중에 그 후손들이 만주와 연해주로 이주해 독립운동의 한 뿌리가 되는 과정이나 위정척사파에 속하는 여러 성리학자들의 자기 혁신 과정 등 조선 후기 몇몇 양반들의 움직임은 부족하나마 이후에 전개될 한국철학에 좋은 토양을 이룬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조선 철학은 서서히 죽음을 향해 기울어져 갔고, 그 무덤가에서 한국철학의 탄생을 향한 움직임이 생겨났다. 우선 도시의 민중들 사이에서는 만민 평등에 기초를 둔 서학이 퍼져 나갔다. 서학의 중대 결실인 한글로 된 정약종의 『주교요지』와 최창현의 『성경직해』는 이 땅의 민중들에게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이라는 사유의 씨앗을 공급했다. 이 씨앗은 동학에서 싹이 텄다. 동학의 등장은 “스스로 ‘나’의 이성으로 ‘나’의 말과 글로 ‘나’의 고난 속 ‘나’를 반성적으로 돌아보며 제대로 ‘나’의 주체성을 만들어 갈 수 있음”을 뜻하는 한국철학의 진정한 출발점이다. 

저자는 한국철학을 “민중과 더불어 있”는 철학, “한국이란 조건 속에서 고난의 역사에 고개 돌리지 않”는 철학으로 정의한다. 그 현실적 시작은 1919년 3.1혁명이다. 이 혁명은 민중을 사상의 주체로 끌어 올린다. 예를 들면, 기생 출신 철학자인 정칠성은 한 상징이다. 조선에서 기생은 철학의 주체가 될 수 없었지만, 3.1혁명에 참여하면서 정칠성은 글을 적어 여성 교육을 강조하고 사회 부조리를 비판하는 혁명가로 변신하고 나중에 허정숙, 주세죽 등과 함께 '조선여성동우회'를 결성하기도 한다. 조선 독립 운동의 영웅이었던 홍범도는 하층민인 백정 출신이었다. 

민중의 철학은 주로 강단 바깥에서, 민중이 고통당하는 현장에서 솟아났다. 일제 식민 교육의 영향을 받은 “강단의 철학은 고난의 언어를 몰랐다. 민중을 몰랐다.” 일본 제국주의와 국체 이론, 국민윤리 등을 합리화하는 데 철학의 언어를 빌려 주었을 뿐이다. 이것은 가짜 철학이다. 사실은 철학의 부재요, 일종의 환각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는 김범부의 “화랑 정신”, 안호상의 “일민주의”, 백낙준의 “홍익인간”, 박종홍의 “국민 윤리”를 이러한 관점에서 혹독히 비판한다.

한편, 일제 강점 이래 계속되는 절망과 좌절의 시대 속에서 한국철학은 성장한다. 시대를 받아들이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진짜 철학이 자리를 잡는다. 저자는 윤동주의 도덕존재론, 함석헌의 고난의 형이상학 및 더불어 있음의 존재론, 유영모의 씨알의 형이상학, 문익환의 사랑으로 하나 됨의 형이상학과 발바닥 철학, 장일순의 나락 한 알의 형이상학, 권정생의 자기 내어줌의 형이상학 등에서 한국 철학을 발견하고, 이들의 사상을 깊게 소개한다. 이들은 흔히 우리가 떠올리는 철학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저자는 서양 중세 철학 전공자답게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이븐 시나, 오캄, 데카르트 등과 비교하면서 이들이 남긴 저술들을 과감하게도 하나의 철학으로 읽어 낸다.

이 책의 결론에 따르면, 유럽과 지중해의 철학은 ‘나’를 한 번도 타자에게 내주지 않은 항상 홀로 있는 존재로 인식하는 홀로 주체성의 철학이다. 그러나 함석헌 등이 수립한 한국의 철학은 ‘너’의 고통 앞에서 ‘나’의 고통을 알고 ‘우리’가 되는, 온전히 존재하기 위해 ‘우리’를 이루는 서로 주체성의 철학이다. 저자가 이러한 정리 작업을 감행한 것은 이후 서로 주체성의 형이상학에 본격적으로 도전하기 위해서다. 멋진 야심이다.

며칠에 걸쳐 이 방대한 책을 나누어 읽으면서 느낀 간략한 소감은, 저자의 바람대로 한국 형이상학의 완성을 위한 첫 주춧돌 성격이 강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공자의 말처럼 “임무는 무겁고 길은 멀다.” 언어의 온도가 높다는 것은 이후에 장대하게 펼쳐질 작업에서 저자가 좀처럼 지치지 않을 것을 기대하도록 만든다. 김건우의 『대한민국의 설계자들』(느티나무책방, 2017)과 함께 읽으면 좋을 것 같다. 한국 현대 사상에 관심 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readingbook2020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