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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24시간 시대, 신자유주의적 시간 정치의 기원

김학선의 『24시간 시대의 탄생』(창비, 2020)김학선, 『24시간 시대의 탄생』(창비, 2020)


1980년대 정치·사회·문화
‘생활 시간’ 변화 관점서 탐색
경쟁 이기려 밤낮없이 일하고
박카스·우루사 먹으며 버텨
정부 ‘3S’ 앞세워 시민 통제
TV에 의해 진짜 휴식 빼앗겨


1980년대는 군사 반란과 내란으로 시작되었다. 시민들에게 ‘파쇼 타도’가 당연한 정치적 과제로 주어졌다. 하지만 이 시기에 경제적으로는 ‘개방’이라는 형태로 신자유주의가 도입되었고, 사회적으로는 패스트푸드가 일상화되고 외국 상표 의상이 일상화되는 소비문화가 발흥했으며, 문화적으로는 ‘3s(섹스・스크린・스포츠) 정책’으로 압축되는 대중문화가 꽃피기 시작한다.

김학선의 『24시간 시대의 탄생』(창비, 2020)에 따르면, 1980년대에 ‘지금 여기’를 둘러싸고 두 가지 정치가 충돌했다. 신군부 정권은 박정희 시대의 ‘적폐 청산’과 ‘새 시대의 도래’를 선언하면서 현재의 시간을 미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자원으로 개발하려 했다. ‘서울올림픽 이후’와 ‘2000년대’ 담론은 신군부가 제시한 미래의 시간이었다. 이에 맞서 시민사회는 현재를 오랜 민주화 투쟁의 연속으로 인식하면서 ‘지금 여기’를 즉시 바람직한 현실로 ‘개선’하고자 했다. 현재를 “미래를 위해 희생”하거나 “개발을 위해 파괴”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지 않은 것이다.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이용하고 개발할 것인가 하는 인식의 차이는 다툼으로 이어지면서 ‘시간 정치’의 장을 열어젖힌다. 근대의 시간은 시계 장치로 상징되는 전일성(全一性)을 특징으로 하지만, 누구나 똑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거센 서구화의 물결 속에서도 우리는 아직도 설날과 추석에 음력의 시간을 살아간다. 생일을 음력으로 기념하는 이들도 주변에 많다. 이는 “국가의 시간과 시민의 시간” 또는 “글로벌 시간체제와 로컬리티 시간체제” 간에 괴리가 존재하며, 일상을 조직하는 데 두 가지 시간이 치열하게 경합하고 있음을 잘 드러낸다. 이 책은 1980년대 ‘하루 24시간’을 둘러싸고 벌어진 국가・자본・시민사회의 격렬한 쟁투 과정을 통해 한국인의 시간이 “사회발전과 자기개발”이라는 신자유주의 시간에 포획되어 가는 기원적 과정을 탐색한다.

1982년 1월 5일 자정, 야간통행금지제도가 폐지되었다. 이로써 하루 24시간이 시민의 손에 온전히 맡겨졌다. 조선은 500년 내내 야간통행을 금지했다. 1895~1908년까지 대한제국 때 통행이 잠깐 허용되었으나, 조선인의 저항을 저지하기 위한 식민통치 수단으로 일제가 재도입했고, 미군정 역시 점령지 통제방법으로 이를 이어갔다. 대한민국 건국 후에도, 방첩과 치안을 이유로 경범죄처벌법을 통해 국가권력은 통금을 유지해 왔다. 헌법이 보장하는 신체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비판에도 아랑곳없었다.

그러나 서울올림픽 유치가 계기로 작용했다. 1981년 9월 30일,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한국의 통금제도가 논의되었다. 이에 전두환 정권은 ‘세계 속 한국’이라는 이미지를 제고할 국가적 필요, 박정희 시대의 적폐를 청산하고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계기 마련 등의 이유로 석 달 만에 통금을 폐지했다. 시민들을 향해 ‘스스로 다스릴 줄 아는 생활인’, ‘자율시대’에 걸맞은 ‘올림픽 시민’으로 거듭나라는 요구도 빼먹지 않았다.

이 조처를 통해 신군부 정권은 “대외적으로는 개방을 표방하고 대내적으로는 자율이라는 통치 규율을 이끌어” 감으로써 유신 때의 비정상을 철폐하는 ‘정상화 주체’로 자리 잡는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은 “선진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스스로를 규율하는 “자발적 발전 주체”로 호명된다. 또한 통금해제는 ‘24시간 경제시대의 개막’이기도 했다. 자본 측면에서 보면, 이 조처는 수출 및 내수 증가에 발맞추어 중단 없이 생산-소비가 이루어지고 자본을 굴릴 수 있는 시간이 출현한 것이기도 했다. 그 결과, 시민의 일상시간을 국가 발전을 위한 자원으로 관리하고 조직하려는 ‘국민생활시간조사’ 같은 시도가 생겨나고, 시민들은 이에 호응 또는 저항하면서 시간 자원을 사용하는 주체로 훈육되었다.

통금해제로 늘어난 시간은 여유와 자유를 위해 쓰이지 않았다. 심야극장・야간낚시 등 소비 활동의 재료로 탕진되거나, 노동자의 경우 야근과 철야에, 학생의 경우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이라는 이름의 입시경쟁에 소진되었다. 오히려 “장시간 노동 또는 증가된 학습 시간”으로 인해 사람들은 “시간 압박”에 시달렸다. 타이밍 같은 “각성제 남용”과 박카스・우루사 등 피로해소제의 높은 판매량이 그 증거다. “휴식과 침묵의 시간”이 사라지면서 “경쟁에서 이기려고 낮과 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구분 없이 노동”하는 “시간의식”이 자리 잡았다. 불행히도 신자유주의적 성과사회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한편, 시민의 일상에 대한 군사적 통제를 유지하려고 신군부 정권은 ‘야간 등화관제 훈련’을 강화했다. 그러나 오정희의 소설 「어둠의 집」에서 보듯, 이 시간은 “자율의 강압적이고 통제적인 면모”를 드러내면서 시민들이 “시대의 어둠과 개인의 자유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으로 작용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대학생 전방입소훈련, 극장의 애국가 상영, 국기하강식 등도 강제되었으나 사회적 반발을 지속적으로 일으켰을 뿐이다. 

‘24시간 시대’ 시민의 일상 시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이 TV 편성표다. 1980년 통폐합을 통해 언론을 장악한 신군부는 정권 정당성 홍보에 방송을 적극 활용했다. 컬러 방송 정규화, 아침방송 재개, 뉴스시간 고정 편성, 프로야구 중계 등 TV를 통해 시간 질서를 새로 구축해 갔다. 그 결과, “TV에 의한 여가의 식민화” 현상이 나타나면서 TV를 통해 “시민의 일상 시간”을 “정치적 자원”으로 동원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국풍 81, 독립기념관 성금모금, 이산가족찾기 등의 미디어 이벤트를 함께 시청하는 경험을 통해 시민들 가슴에 국가 정체성을 심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땡전 뉴스’가 상징하는 공영방송의 편파성은 시청료 거부 같은 시민적 저항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밖에도 이 책은 ‘서머타임’이 여가시간이 아니라 노동시간만 늘림으로써 실패에 이르는 과정, 기억의 정치가 작동하는 기념일을 둘러싼 분쟁 등을 소개한다. 

신진 연구자인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시간 자원’을 국가 및 경제 발전을 위해서만 동원하려 하는 국가와 자본의 전일적 시간관을 해체하고, 시민 각자가 일상에 더 많은 자유를 불어넣을 수 있는 다층적, 다면적 시간성을 회복하려 한다. 후속 연구를 통해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시간 정치에 균열을 일으키는 새로운 시간 정치가 어디에서,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살펴 주었으면 좋겠다.

#readingbook2020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