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의 기원
카페(cafe)라는 말은 터키어 카흐베하네(kahvehane)에서 연유한다. 카르베하네는 카흐베(kahve, 커피)와 하네(hane, 여관 또는 선술집)가 합쳐진 말이다. 카흐베의 어원은 카흐와(quhwa) 또는 카와(khawah)인데, 이 말은 ‘자극과 활기를 불어넣다’는 뜻이다.
커피는 본래 이슬람 수피들이 종교의식을 위한 신성한 각성제로 이용했다. 현세 부정의 화신인 수피들이 철저히 비사교적이었던 반면, 아이러니하게도 카페는 ‘활기를 불어넣는’ 커피의 힘을 이용해 활발한 사교의 장을 열어젖힌다. 카페는 커피가 본래의 종교적 기능을 잃고, 세속화하면서 생겨난 사교 공간에서 출발했다.
오스만제국의 카흐베하네
카페의 나라 프랑스
프랑스는 ‘카페의 나라’이며, 세계 카페 문화의 중심지이다. 1686년 카페가 처음 생겨난 이래, 프랑스에서 카페는 정치, 사회, 사상, 문화의 변화를 일으키는 주요한 원천으로 기능해 왔다. 17세기에는 주로 문학을 토론하는 공간으로, 18세기에는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어지는 정치토론의 장이자 혁명 정신의 온상지였고, 19세기에는 시인, 예술가, 철학자 들이 문학, 연애, 취미, 철학 등을 토론하는 담론의 장이었고, 예술가들이 화풍을 고민하고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이었으며, 동시에 노동자들이 비좁고 답답한 집을 떠나서 떠들썩하게 사교를 나누는 공간이었다. 20세기에도 이러한 전통은 면면히 이어져 초현실주의, 실존주의 등이 발원하는 공간이 되었다.
1669년 술탄 메흐메드의 대사인 솔리만 아가가 파리에 등장하면서부터 파리에서 커피 소비가 대중화되었다. 솔리만 아가는 값진 터키 카펫이 걸린 화려한 자기 아파트에 파리의 명사들을 초대한 후, 커피를 마시기 전에 장미향이 나는 물 손을 씻고, 멋들어진 의상을 차려입은 아프리카 카베지바치가 나와 원두를 볶아서 빻은 뒤에 신비한 ‘흑포도주’를 끓인 다음, 무릎을 꿇은 채 최고급 모카를 내놓았다. 몰리에르가 『평민귀족』(1670)에서 잘 꼬집어 주었듯, 파리의 웬만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방을 터키식으로 꾸며 놓고 아랍 옷을 걸친 누비아 노예의 시중을 받으며 모카를 홀짝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솔리만 아가
르 프로코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
프랑스 최초의 카페는 1654년 마르세유에서 생겨났으며, 파리 최초의 카페는 1672년에 아르메니아 사람 파스칼이 파리의 생제르맹 근처에서 열었다. 하지만 꾸밈을 좋아하는 파리 스타일이 아니었으므로 곧 문을 닫았다.
1686년 소르본 대학교 근처에서 문을 연 ‘르 프로코프’가 스타일을 중시하는 파리 최초의 카페로, 모든 파리 카페의 원형이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카페다. 프로코프의 단골은 맞은편에 있던 코메디 프랑세즈의 남녀 배우들과 관객들이었다. 사람들은 연극을 본 후,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페의 창업자 프랑시스코 프로코피오 델 코스텔리는 파스칼의 제자로, 프랑스인의 흥미를 끄는 것은 ‘음료로서의 커피’가 아니라 ‘유행으로서의 커피’라는 사실을 꿰뚫어보았다. 그는 대리석 탁자와 거울과 샹들리에로 카페를 장식하여 귀족적인 분위기를 연출한 후 가르송에게 흑백 복장에 흰 가발을 쓴 채 팔에는 백색 헝겊을 걸치고 손에는 은색 찻주전자를 쥐게 함으로써 고급 사교 공간 분위기를 연출했다. 프랑스인들은 이 스타일에 “버터처럼 녹아들었다.” 이후 이 스타일은 하나의 전형으로 전 세계에 전파되었다.
르 프로코프 스타일의 가르송
르 프로코프의 내부
카페, 혁명의 대학이 되다
17세기가 문학을 통한 사교의 시대였다면,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사회에 유용한 생각을 즐겁게 교환하기 위해 사람들과 만나려 했다. 카페는 생각의 교환을 통해 이성을 벼리고, 사교를 통해 교류의 즐거움을 누리면서 세련된 감성을 갖추어 나가려는 사람들이 가장 즐겨 찾는 공간이었다. 쥘 미슐레의 지적처럼, 1700년대 중반에 이르러 곳곳에 들어찬 카페와 호텔은 파리를 하나의 거대한 카페로 만들었다. 몽테스키외는 『페르시아인의 편지』에서 “커피 마시는 사람들에게 지성을 부여하는 공간”으로 카페를 묘사한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르 프로코프는 볼테르, 루소, 디드로 등이 모여들어 이성에 기초한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면서 정부, 교회 등의 권력을 자유롭게 비판하는 공간이 되었다. 1740년대에는 ‘밤에 호롱불 천 개로 비추어 현란한 분위기’를 연출했던 카페 드 라 레장스도 이들의 아지트였다. 이 카페는 『라모의 조카』에서 디드로가 철학자와 라모의 조카가 만나는 장소로 설정한 곳이었다.
1789년 전후로, 카페는 혁명의 주역들이 은밀히 모여 혁명을 준비하고, 긴박하게 돌아가는 정치적 사태에 대비했던 공간이었다. 프로코프는 ‘혁명의 대학’ 또는 ‘파리의 진정한 신문’이라고 이야기될 정도로 혁명카페로 변신했다. 자코뱅 당원들의 자유의 상징인 붉은 모자(Le bonnet frizian)가 처음 등장한 곳도 르 프로코프였다.
‘카페 데 아뵈글’에서는 귀머거리 가수가 이끄는 눈먼 악단이 나와 무능한 왕정을 비꼬는 패러디를 연출했고, ‘카페 베르’에서는 귀족을 비난하는 뜻으로 원숭이를 훈련시켜 손님 목에 달려들도록 하는 등 정치적 주장이 경박하면서도 통렬하고 풍자적인, 지극히 파리다운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1789년 혁명의 서막인 7월 14일 바스티유 진격 사건은 팔레루아얄에 위치한 카페 드 푸아에서 시작되었다. 그날 이 카페의 뜰에서 인민재판이 진행되고, 파리 시장 플레셀이 민중의 이름으로 처형되었다.
『라모의 조카』의 배경이 된 드 라 레장스 카페
오베르냐, 파리 카페의 아버지
파리에 카페들이 가득 차게 된 데에는 오베르냐의 영향이 컸다. 오베르냐는 파리 남쪽 80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산악 지대 오베르뉴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1700년대에 오베르뉴 농부들은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자기 마을에서 캔 석탄을 ‘샤르보니에’라는 이름으로 파리에서 팔았다. 이어서 물과 레모네이드를, 그다음에는 자신들의 석탄으로 끓인 뜨거운 물을 팔았다. 커피가 유행하면서 이들은 커피를 끓여 사람들 집 앞까지 배달해 주었다. 『감정교육』에서 플로베르는 “오베르뉴 사람들처럼 부지런히 움직여 상당한 재산을 긁어 모았다.”라고 했는데, 이들의 타고난 근면성과 강한 생존력을 잘 보여 준다.
오베르냐들이 갖가지 도구를 끌고 질퍽한 파리 거리를 돌아다니는 대신 한 사람씩 장소를 정해 가게를 차린 것이 파리 카페의 전신이다. 오베르냐들은 손수레 주위에 벽을 올리고 그 바깥으로 의자를 한두 개 놓아서 장사를 했다. 1800년대 후반까지 오베르냐 약 50만 명이 파리로 이주했는데, 이후에 ‘드 마고’, ‘카페 플로르’, ‘리프’ 등 유명 카페들이 속속 등장했다.
행상하는 여인
카페, 부르주아 카페와 노동자 카페로 나누어지다
나폴레옹 3세의 지원 아래 1853년부터 18년 동안 추진된 오스만의 파리 근대화 정책으로 인해 파리의 카페는 부르주아 카페와 노동자 카페로 나뉘었다.
교외에 공장이 들어서면서 저소득층은 파리 주변부(북동부)로 밀려나는 한편, 파리 중심부와 서부의 대로를 중심으로 거주하는 집만큼이나 많은 부르주아 카페들이 곳곳에 들어섰다. 19세기 파리의 유명한 그랑 카페 파리지엥은 호화로운 실내 장식의 극치를 보여 준다. 에밀 졸라가 한 소설에서 “샹들리에의 빛이 차도까지 환히 밝혀”준다고 묘사했던 카페 리슈는 실제 이탈리엥가에 있던 카페로 파리의 대로를 아름답게 했다.
한편, 19세기 중반 이후 카페는 노동자 계급 문화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촉매 역할을 했다. ‘서민들이 드나드는’ 또 다른 카페인 카바레와 시골 술집 형태로 가난한 도시 노동자들의 휴식 공간인 비스트로 등 커피, 술, 음식을 파는 다양한 형태의 카페가 1885년에는 4만 2000여 개로 증가했다. 모파상의 『저녁』이나 졸라의 『파리의 중심』에서 볼 수 있듯, 당구대가 등장한 카페는 도박, 음담패설 등 타락과 범죄와 온갖 악의 온상이 되었다. 카페는 만젱그(mannezingue, 선술집), 아소무아르(assommoir, 목로주점) 등으로 불렸고, 간판에는 오 트라바이외르(Aux travailleurs, 노동자) 등이 쓰여 있었다.
일요일이 되면 노동자들은 교회에 가는 대신 여가 시간 대부분을 카페에서 보냈다. 부르주아들의 ‘행복한 집’과 달리 비좁은 거주 공간에서 살았던 노동자 계급은 언제나 같은 곳에서 방문객을 반겨 주는 카페 주인, 거주지 이웃인 단골손님들, 숨통이 트이는 카페 공간에서 동질감과 소속감을 느꼈다. 노동자에게 카페는 노동자에게 친목과 휴식의 공간이자 근대적 여가를 향유하는 장소였다. 노동자들은 적은 수입을 카페에서 모두 써 버린다는 우려를 받기도 했고, 도덕적 타락과 무절제로 비판받기도 했다.
파리 거리에 들어선 카페들
카페, 예술적 영감의 공간이 되다
19세기 중엽, 예술가들에게 카페는 예술적 영감의 공간이 되었다. 화가, 조각가, 시인, 소설가, 음악가 등은 예술을 위한 예술을 부르짖으면서 카페로 모여들었다. 「인공낙원」(1860)에서 보들레르는 카페 데 자르에 모여 취한 예술가들의 모습을 잘 그리고 있다. “달래야 할 회한을 마음속에 지녔던 사람, 되씹을 추억, 묻어 버릴 고통이 있었던 사람, 사상누각을 쌓아 올렸던 사람…… 이들 모두가 포도밭 넝쿨 속에 감춰졌던 신비로운 신을 불러낸 것이다.” “만약 인간이 만들어낸 것 중에 포도주가 없어진다면 지구에 사는 인간들이 건강과 지성에는 구멍이 뻥 뚫려버릴 것이며, 그 부재, 그 결함이야말로 이른바 포도주 때문에 빚어진다는 모든 비행과 일탈보다 더 한층 끔찍할 것이라고.”
커피 상인이자 하레르의 시인이었던 랭보는 데카당의 상징 폴 베를렌과 함께 ‘카페 라 모르’에 곧잘 나가곤 했다. 랭보는 베를렌에게 손을 탁자에 얹으라고 하고는 이 남자의 허리를 베었고, 베를렌은 랭보를 총으로 쏘아 이에 화답했다. 랭보는 여러 카페를 전전하며 고가의 신종 독주였던 압생트를 즐겼다.
카페 라 모르의 랭보와 베를렌
카페, 예술가들의 피난처가 되다
19세기 말에는 예술가들이 파리의 몽마르트르에 모이기 시작했다. 마네, 드가, 르누아르 등은 라 누벨 아텐을, 다른 인상파 화가들은 빠티뇰 가의 카페 게르부아를 자주 찾았다. 카페 리베르에서는 공모전에서 낙선한 화가들의 그림이 카페 벽에 처음으로 전시되기도 했다.
1920년대 이후 예술가들은 몽마르트르 언덕을 내려와 현대화된 도시의 세련됨을 풍기는 몽파르나스 구역의 카페로 이동했다. 이 무렵, 파리의 카페는 초현실주의자들이 일으킨 추문의 발생지였다. ‘분류할 수 없는 생각들과 한결같은 반항심’을 가진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카페는 낭만적 피난처가 되어 주었다. 그들은 카페 세르타, 파사주 드 오페라에 있는 르 프티 그리용, 앙드레 브르통의 아파트 근처에 있는 플라세 블랑슈의 시라노에서 만났다. 시라노는 초현실주의자들이 국외자나 괴벽스러운 인간들과 섞일 수 있는 사회 주변부로서 매력적 장소였다.
몽파르나스 대로에 있는 카페인 클로즈리 데 릴라는 초현실주의자들이 최초의 추문을 일으켰던 현장이다. 1925년 7월 2일 메르퀴르 드 프랑스 출판사가 시인 생 폴 루를 위해 문학 축하연을 열었던 이 카페에서 초현실주의자들은 격한 슬로건을 외쳤고, 서로 주먹질을 했으며, 창문을 깨뜨리는 등의 소란을 피웠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카페 르 시라노
카페, 실존주의의 고향으로
20세기 중반 실존주의 철학을 꽃피움으로써 세계 지성의 산실로 자리매김한 카페는 생제르맹 구역의 카페 드 마고와 카페 드 플로르이다. 1885년과 1881년에 각각 문을 연 카페 드마고와 카페 플로르는 좋은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며 발레리, 릴케, 콕토, 오스카 와일드, 막스 에른스트, 피카소, 브라크, 지드, 생텍쥐페리, 헤밍웨이, 카뮈, 말로, 바르트 등 많은 문인과 화가, 철학가들에게 담론의 장소를 제공했다. 특히 이 두 카페는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그들의 사랑과 철학을 나눈 장소로 유명하다.
카페 플로르의 주인인 폴 부랄에 따르면 사르트르는 “에스프레소 한 잔을 놓고, 잔을 채우는 법 없이 아침부터 밤중까지 앉아 열두 시간을 버티는 놀라운 괴력을 보여 준, 가장 지독한 손님”이었다. 이러한 문인과 예술가들로 인해 생제르맹의 카페는 전 세계인의 카페가 되었다.
카페 드 마고
쥘 미슐레가 『나의 일기』에서 지적한 것처럼, 커피 문화는 서양에서 계몽된 문명화 사회를 태동시킨 주요 원인 중 하나다. “새로운 풍습을 만들고 인간의 기질까지 바꾸어 놓은 대대적인 사건, 즉 커피의 출현은 창조적 사고에 큰 몫을 했다.” 강렬함, 도취, 각성이라는 모든 양태가 혼합된 카페는 사람들이 일상의 자신을 잊고 다른 존재로 변신할 수 있었던 공간이며, 자유롭게 새로운 문화가 태동하고 유입되는 문화적 역할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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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은숙, 이승억의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토포스로서의 카페」, 《한국프랑스학논집》 제101집(한국프랑스학회, 2018)을 정리하면서, 몇 마디 말들을 덧붙이고, 사진과 그림을 넣어 본 것이다. 독창성이라곤 당연히 조금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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