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심장이 부활하고 있다. 유라시아 대륙은 “세계 인구의 75%, 에너지 매장량의 75%, 세계 총생산의 60%를 보유”하고 있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 동안 이곳이 “지정학적 중심축”이었으며, 서반구와 오세아니아 등은 “지정학적 주변부”에 불과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서구 여러 제국은 함선 등 과학기술을 활용해 기동력을 확보함으로써 이 심장을 해양에서 포위하는 식으로 패권을 얻었다. 네덜란드, 스페인, 영국, 미국 등이 모두 같은 지정학적 전략을 사용했다. 그러나 경제 대국으로 일어선 중국의 거대한 투자를 바탕으로 철도와 고속도로, 석유와 천연가스 수송관 등이 유라시아 내륙에 들어서면서 유라시아 전체가 하나로 통합돼 ‘세계섬’을 이룩하는 ‘대전환’이 시도되는 중이다.
앨프리드 맥코이의 『대전환』, 홍지영 옮김(사계절, 2019).
제국이란 “강대국이 직접 통치(식민지)나 간접적(군사적, 경제적, 문화적) 영향력 행사를 통해 다른 이들의 운명에 지배력을 행사하는 글로벌 거버넌스의 한 형태”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의 세계, 특히 1989년 사회주의 붕괴 이후의 세계가 ‘미국의 세기’라는 점은 이견의 여지가 없다. 지난 70년 동안 글로벌 팍스 아메리카나, 즉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를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해 미국은 전 세계에서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전쟁을 수행해 왔다. 압도적 군사력을 바탕으로 “중국과 러시아를 유라시아 대륙의 심장 지역에 가둔 채 5개 대륙을 누비며 자원을 취하고 물건을 팔면서 전대미문의 힘을 부렸다.”
미국은 식민지를 직접 지배하는 대신 겉으로는 우아한 형태를 취했다. 미국은 “우방과 동맹을 형성할 때는 아테네를, 세계 전역에 파병한 군대로 패권을 유지할 때는 로마를, 문화·상업·동맹을 통합해 전 세계에 포괄적 체계를 구축할 때는 영국 제국을 닮았다.” 요컨대 미국 제국은 역사상 존재했던 여러 제국의 융합이요, 절정이다. 미국은 동맹을 통해 태평양과 대서양 양쪽에 군사기지 수천 곳을 둔 채 유라시아 대륙의 심장을 통제하면서 주변부 국가 전체를 미국의 이익 공동체로 묶어 지배권을 행사하는 최초의 ‘진정한 세계제국’이 됐다.
그러나 『대전환』(홍지영 옮김, 사계절, 2019)의 저자이자 동남아시아사의 세계적 권위자인 앨프리드 맥코이에 따르면, 패권을 향한 미국의 진짜 전쟁은 늘 어두운 그림자를 동반했다. 미국은 세 단계를 거쳐 미국 제국으로 성장했다.
첫째 단계는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으로부터 1935년 필리핀이 사실상 독립할 때까지다. 미국은 “최초로 세계 무대에 진출해 대서양에서 서태평양까지 1만6000㎞에 걸쳐 뻗은 열대섬을 손에 넣어 직접 식민지를 운영”한다. 이 시기에 미국은 파나마 운하를 건설해 미국의 해군력을 효율적으로 태평양과 대서양 양쪽으로 전개하는 위업을 달성해 유라시아 대륙 양 끝을 동시에 통제하는 힘을 얻고, 필리핀 등에 대한 직접 식민통치 과정에서 고문 및 감시 등 각종 지배 기술을 획득해 이후의 통치 유전자에 심는다.
둘째 단계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1990년까지다. 압도적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춘 해양 국가 미국은 패권을 놓고 대륙 국가 소련과 냉전에 돌입한다. 미국은 직접 군사 개입, 동맹·조약 등 국제 협력 체제 구축, 유엔·세계은행·국제통화기금 등 국제기구 주도, 국방 기술에 대한 막대한 투자 등의 방법으로 패권을 추구한다.
문제는 어둠 속 전쟁이다. 미국은 육해공을 넘어서 제4의 지대, 즉 비밀 세계를 새로운 전장으로 삼았다. 겉으로 자유와 민주의 수호자를 자임했던 미국은 이 시기에 공작이라는 형태의 무자비한 비공식 전쟁을 계속했다. 냉전의 승리라는 현실적 이유를 빌미로 곳곳에서 잔인하고 부패한 독재자를 협력자로 삼음으로써 스스로 내세운 자유와 민주의 가치를 훼손해 전 세계 민중의 지지를 잃었다. 심지어 범죄 조직과 손잡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이슬람 원리주의와 아편을 이용해 소련군을 몰아냈고 니카라과에서는 콘트라 반군과 코카인 밀매를 조종해 정권을 교체했다.” 냉전이 끝나자 원리주의 조직이 자율성을 획득하면서 테러 조직으로 발전했을 뿐만 아니라, 이 지역들에서 생산된 마약 탓에 전 세계적으로 마약 중독자가 급증했다. 게다가 범죄 조직, 반란군, 비밀 세력 등이 범죄 수익을 통해 자금줄을 획득했다. 9.11테러를 일으킨 탈레반도 그중 하나다.
세 번째 단계는 21세기 초에 시작돼 지금껏 계속된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에서 획득한 기술에 바탕을 두고 사이버 전쟁, 우주 전쟁, 무역 협정, 군사 동맹을 융합해 패권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중국의 성장에 따라 대서양 중심의 세계 전략을 아시아-태평양 중심으로 전환하고, 일본·한국·필리핀·호주 등에 새로 군사 기지를 구축함으로써 ‘심장의 귀환’을 막으려고 애쓰는 중이다. 우주를 패권을 위한 새로운 전장으로 삼고, 사이버 공간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힘을 획득하려고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
그러나 영원한 제국은 없다. 오늘날 미국의 리더십은 정치·경제·문화·도덕 등 모든 차원에서 급속한 쇠퇴 징후를 드러내고 있다.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무리한 재정 투자가 오히려 미국 제국의 지배를 한계로 몰아붙이고 있다.
세계화의 진전에 따라 중국·인도·러시아·터키·브라질 등이 떠올라 세계 경제가 다극 체제로 이행 중이다. 동맹국 지도자들까지 감시하면서 비밀 공작을 벌여온 ‘은밀한’ 정책이 위키리스크에 폭로된 후, 미국 제국에 대한 전 세계 국가의 신뢰와 동의는 사실상 파탄을 맞았다. 관타나모 등에서 널리 자행된 비인간적 고문은 미국의 실체적 지배 형식에 대한 윤리적 의구심을 불러왔다. 무고한 민간인 학살로 자주 이어진 드론 전력의 강화 및 이란·북한을 겨냥한 적이 있는 사이버 무기에 대한 집착 등은 지상에서 미군의 영향력을 점차 떨어뜨리는 중이다. 트럼프의 자국 중심주의 정책은 물론 미국 제국의 쇠퇴를 촉진하는 부채질에 가깝다.
저자에 따르면, 제국의 시스템은 매우 섬세히 작동하기에 강력해 보이는 제국일수록 오히려 쉽게 무너진다. 재정적 임계점을 넘고 나서 “포르투갈은 1년, 소련은 2년, 프랑스는 8년, 오스만 제국은 11년, 영국은 17년 만에 해체됐다.” 저자에 따르면, 2003년 이라크 침공 후 몰락하기 시작한 미국 제국의 수명은 27년이다.
저자의 일방적 주장만은 아니다. 2012년 미국 국가정보위원회 보고서에는 이런 문구가 나온다. “2030년경이면 어떤 나라도 패권을 독점하지 못할 것이며, 1750년 이후 서방 중심의 역사는 대체로 역전될 것이다.” 어찌 보면 미국 제국의 몰락이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때까지 10년 남짓 남았다. 이 예측이 실제로 실현될지는 모르겠으나,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적 질서는 더 이상 현재와 같은 형태로 작동할 수 없다. ‘대전환’이라는 한국어판 제목이 참 적절하다. 격동을 피할 수 없다면 폭넓은 시야와 명철한 지혜를 겸비할 필요가 있다. 독서가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평론과 서평 > 절각획선(切角劃線)'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와 지성 (보들레르) (0) | 2019.12.15 |
---|---|
테니스의 미학이 탄생하다 (0) | 2019.12.02 |
프랑스 카페의 역사 (0) | 2019.10.06 |
북튜버는 어떻게 돈을 버는가 (0) | 2019.08.04 |
편집자로 일하면 좋은 세 가지 이유 (0) | 2019.07.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