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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발자크, 정치의 절망에서 문학의 희망으로

1830년 프랑스에서 7월 혁명이 일어난다. 혁명 직후, 서른한 살 청년 발자크는 깊은 고뇌에 사로잡힌다. 발자크 생각에, 가장 확실한 것이 불확실해졌다. 혁명 세력이 진보라 부르는 역사의 흐름을 돌이킬 수 없는 건 분명하다. 그러나 돌아가는 꼴을 보니 그 흐름이 ‘인간다운 삶’의 실현을 향해 열린 것인지를 도무지 알 수 없다.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돌아서지도 못하는 양난의 상황에서 발자크는 방황한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과 공포정치, 1799년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에 이은 나폴레옹 집권, 혁명 이념을 전파하기 위한 잇따른 전쟁과 1815년 워털루 전투 패전으로 인한 나폴레옹 유배, 루이 18세의 복고 왕정과 특권을 유지하려는 귀족들의 폭정 등. 프랑스는 대혁명 이후 격동적이고 드라마틱한 40년을 달려왔다. 정치 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귀족 특권을 위한 출판 탄압 등 일련의 반동적 조치가 잇따르자 1830년 파리 시민들이 또다시 자유를 위해 봉기한 것이다. 이로써 귀족들 폭정이 끝나지만, 민중들을 위한 공화의 세상은 열리지 못한다. 그리고 상층 부르주아 주도 아래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7월 왕정이 성립한다.

‘신분의 지배’가 끝나자 ‘돈의 지배’가 시작된다. ‘특권의 독재’가 멈추자 ‘자본의 독재’가 노골화한다. 품격 있고 고결한 삶을 지탱해 주는 사랑·우애·믿음·약속 등 윤리의 패배가 선언되고, 물질적 탐욕과 출세의 갈망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파렴치한 세상이 열린다. 인간 사이 관계가 겉으로는 아직 도덕의 형식을 유지하지만, 속으로는 이미 이해가 우선하는 위선의 생지옥이 펼쳐진다. 혁명 전후로 짧은 언론인 생활을 한 발자크는 현실 참여를 멈추고 고민을 계속한다. 발자크는 말한다. 

“맨얼굴은 없고 가면들만 무수하다.”

형식적으로는 무한한 자유와 균등한 기회가 주어진 듯하지만, 각자의 타고난 독특함이 이룩할 개성으로 존중받지는 못한다. 실제 강요된 것은 돈을 향한 무한 경쟁이다. 좋은 삶이 인격의 질이나 인간다운 품위 대신 오직 돈의 축적량으로만 측정된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살 수 있는 사회가 열리고, 신분 제약에서 벗어나 무엇이든 추구하고 실현할 수 있는 자유는 결국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자유로 전락한다.

100년 후, 일본 작가 나쓰메 소세키가 한 단어로 압축한 세상이 열린 것이다. “돈이지. 돈을 보면 그 어떤 군자라도 금세 악인이 된다네.” 피 흘려 얻은 자유의 대가가 고작 ‘악의 번영’이고, ‘위선의 무한 증식’이란 말인가. 발자크의 의문은 요즈음 우리나라 청년들 사이에서 들불처럼 번져가는 질문과 비슷하다. “이러려고 촛불을 들었단 말인가.”


혁명의 세상에서 자신의 잠재력을 온전히 시험할 수 있기를 기대했지만, 청년들이 맞이한 현실은 처참했다. 시쳇말처럼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세계는 오지 않았다. 돈을 벌려면 출세해야 하지만 출세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 현실만이 도드라졌다. ‘고리오 영감’의 라스티냐크처럼 “자기 삶이 거짓인 줄 알지만, 억지로 눈감고 살아야 하는 슬픈 운명”이 청년을 기다렸다. 능력에 따른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사회에서는 타고난 순진성과 인간적 진정성을 추구하는 이들은 파멸하기 십상이기에 모두가 ‘비도덕적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돈과 권력을 좇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정녕 혁명이란 말인가.

“그래, 모든 것이 다 상실된 것은 아니다. 문학이 대중을 기다린다.” 

위대한 작가들이 그러하듯 방황 속에서 발자크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함을 깨달았다. 혁명이 파멸시킨 낡아빠진 세계에 집착하는 보수의 언어도, 혁명의 과실을 사유화하는 데 몰두하는 진보의 언어도 인간을 구하지 못한다. 

“사치의 악마가 가슴을 물어뜯고, 돈벌이의 열기가 눈을 사로잡으며, 황금에 대한 갈증이 목을 말라붙게 하는” 타락한 세상에서는 정치의 언어가 아니라 문학의 언어만이 진실을 그려낼 수 있다. 이런 시대에 작가는 “새로운 시대의 사제”가 되어 비도덕적 사회를 구원할 도덕적 의무를 떠안는다. 

낡아빠진 과거를 조롱하고, 지켜야 할 가치들을 보존하며, 현재의 타락을 기록해 혁명의 적법성을 질문하고, 다른 미래를 상상하는 일은, 발자크의 생각에, 오직 소설에서만 가능했다. 단테의 ‘신곡’에 빗댄 ‘인간극’의 세계가 이로부터 시작된다. 발자크는 소설로 역사를 대체함으로써 정치가 망친 희망을 문학의 언어로 복원하려 했다.

지금, 촛불이 가져온 정치의 윤리가 흔들리는 중이다. 공정과 정의의 진전은 없고 ‘돈의 폭주’가 적나라하다. 우리에겐 발자크가 필요하다. 아아, 소설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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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칼럼입니다. 한두 문장 빼고 덧대어 올려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