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에는 기억할 만한 함축적 문장이 있다. “역사 연구는 원인에 대한 연구다.” (중략) 인과관계의 분석은 카가 『역사란 무엇인가』를 쓰던 시기에 실제로 역사 연구의 중추였다. 그 이후 수십 년간 강조점을 다른 곳에 두는 새로운 경향이 출현했다. 즉, 위대한 사건의 기원에 대한 관심은 줄고 사건에 관여한 사람들이 스스로의 행동을 어떻게 믿고 있었는가에 대한 관심이 늘었다. (중략) [역사에서] 원인을 찾는 것은 역사가의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를 조직하는 나르시시즘과 다름없다. _ 사라 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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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가 나온 지, 벌써 50년에 가깝다. 마르크스주의적 결정론에 사로잡혀 있는 이 오래된 책에 기반을 두고 역사를 이야기하는 방식을 이제는 넘어설 필요가 있다.
현대 역사학의 성과를 따르면, 역사를 연구하는 이유는 원인이나 기원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사람들이 자신의 시공간을 어떻게 경험했는가를 이해함으로써, 지금 이곳의 삶과 다른 삶이 가능함을, 아울러 현재를 절대화하는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다른 미래를 상상하는 힘을 얻는 것이다.
사라 마자의 『역사에 대해 생각하기』, 박원용 옮김(도서출판 책과함께, 2019)는 역사학의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누구의 역사인가, 어디의 역사인가, 무엇의 역사인가, 역사는 어떻게 생산되는가, 원인이 중요한가 의미가 중요한가, 역사는 사실인가 허구인가 등 여섯 가지 질문을 중심으로, 현대 역사학의 이론적 쟁점들을 잘 정리해서 보여 주고 있다.
무엇보다, 편집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쟁점을 소개하면서 이 책이 함께 소개하고 있는 책들이다. 이 책은 우리가 서가에 갖추어 두어야 할 서양사 분야의 위대한 고전들을 거의 빠짐없이 소개하고 있다. 아주 훌륭한 요약과 함께 말이다.
이 점이 바로 이 책을 아주 훌륭한 역사학 입문서로 만든다. 가히 한 책으로 백 책을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만약에 이 책에 나오는 책들로 꾸민 서가가 있다면, 서양사 분야에서 주제별로 분류한 가장 멋진 서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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