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번역/대학 공부

[시골마을에서 대학을 읽다] 지본(知本, 근본을 안다)


공자가 말했다. “송사를 듣고 처리하는 것은 나도 남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나는) 반드시 송사가 없도록 할 것이다.” 진실하지 못한 자가 그 하소연을 끝내 다할 수 없는 것은 백성들의 마음을 크게 두렵게 했기 때문이니, 이것을 일컬어 근본을 안다고 하는 것이다. 子曰, 聽訟, 吾猶人也. 必也使無訟乎. 無情者不得盡其辭, 大畏民志, 此謂知本.


오늘은 전(傳)의 네 번째 장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 장은 물유본말(物有本末, 사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다)의 뜻을 주석하고 있습니다. 고본에는 ‘지어신(止於信, 믿음에 머물다)’ 다음에 이 구절이 있었는데, 주자가 새로 편집하면서 이 자리에 가져다두었습니다. 여러 번 말했지만, 이러한 편집 행위를 두고 후대의 왕양명(王陽明)은 크게 반발하면서 본래 고본을 놓고 『대학』을 주석해 『대학고본방석(大學古本旁釋)』을 짓기도 했습니다. 한 구절씩 읽도록 하겠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송사를 듣고 처리하는 것은 나도 남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나는) 반드시 송사가 없도록 할 것이다.” 子曰, 聽訟, 吾猶人也, 必也使無訟乎. 

『논어』 「안연」 편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청송(聽訟)’은 소송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옳고 그름을 판결하는 일입니다. ‘유(猶)’는 ‘마찬가지’ 또는 ‘다를 바 없다’는 말입니다. ‘인(人)’은 보통 ‘사람’으로 풀지만, 여기에서처럼 ‘남’이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필야(必也)’는 ‘어찌해서든 반드시’라고 풀이하는데, 야(也)는 특별한 뜻 없이 음절을 맞추려고 넣은 어조사입니다. ‘사(使)’는 ‘~하게 하다’입니다. 뒤에 목적어 ‘백성들’이 생략되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김기평은 이 글자에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 가지런히 하며 몸소 행하여 백성들을 감화한다는 뜻이 들어 있다.”라고 보았습니다. 억지로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덕으로 감화해 가르친다고 본 것입니다. ‘호(乎)’는 단정적인 뜻을 표시하는, 또는 의지를 표시하는 종결사입니다. ‘~하겠다’ ‘~하리라’ 등으로 해석합니다.

쉰 살 무렵 공자는 노나라에서 대사구(大司寇)라는 직책을 잠시 지낸 적이 있습니다. 대사구는 법을 다루는 관리들의 책임자였으므로 공자는 법률을 남들만큼 잘 알았습니다. 하지만 공자는 죄와 형벌의 세상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공자는 법(法)이 아니라 인(仁)으로 다스려지는 세상을 원했습니다. 무송(無訟), 즉 재판 없는 사회를 꿈꾸었습니다. 세상에서 재판이 사라지는 이상사회를 희망했습니다. 그러려면 정치하는 사람의 밝은 덕이 이미 온 세상을 밝혀서 천하가 평화로워야 합니다. 그런 정치가 먼저 세상에 행해져야 합니다. 신창호의 말처럼, “예의와 도덕을 바로 세워 사람살이의 근본을 바르게 하고 서로 배려”해야 합니다. 따라서 공자는 소송이 있을 때 법을 잘 쓰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소송 자체가 없도록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을 잘 다스려 백성들 역시 마음에 밝은 덕을 품도록 교화를 행하면, 사람들이 쓸데없이 송사를 일으키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니, 이로써 죄를 짓고 처벌을 엄격히 집행하는 사후약방문은 절로 없어질 겁니다. 『사서집주(四書集註)』에서는 다음과 같이 풀이합니다. “소송을 듣는 것은 말단을 다스리고 그 흐름을 막는 것이다. 근본을 바르게 하고 근원을 맑게 하면 소송은 없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지본(知本), 즉 근본을 안다고 하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리쩌허우는 이 구절에서 법에 의한 통치, 즉 소송을 하고 법정이나 관청에 하소연하여 해결하기보다 서로 타협해서 화해하거나 사적으로 해결하기를 원하는 중국 특유의 문화-심리 구조가 탄생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새로운 정치, 즉 ‘협치(協治)’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골칫거리들을 모조리 국가 권력(법)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주민(자치)위원회 등에서 이미 대화와 타협을 통한 ‘협의의 윤리’가 실행되는 공공 공간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는 상당히 시사점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국가 권력이 시민사회의 자율을 억압하고 그 잠재력을 박탈하는 일이 아직도 흔한 세상에서 시민적 공동체가 형성되어 자율적으로 성숙할 수 있도록, 동양의 문화적 전통에 기반을 둔 생각의 기초를 제공합니다. 리쩌허우는 이를 ‘예법(禮法)’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이끌어 법으로 들어가고, 법을 세속에 융합하는” 것, 즉 법률체제를 마련하고 이를 실행할 때 도덕을 중시하고 인정을 앞세우는 전통이 작용할 수 있도록 고민해 보자는 것입니다. 깊이 숙고할 가치가 있는, 상당히 흥미로운 생각입니다.


진실하지 못한 자가 그 하소연을 끝내 다할 수 없는 것은 백성들의 마음을 크게 두렵게 했기 때문이니, 이것을 일컬어 근본을 안다고 하는 것이다. 無情者不得盡其辭, 大畏民志, 此謂知本.

공영달은 ‘정(情)’을 ‘실(實, 실상, 진실)’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면 ‘무정자(無情者)’는 ‘진실이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진(盡)’은 보통 ‘다하다, 사라지다’의 뜻인데, 이 문장에서는 ‘어떤 일을 끝까지 마치는 것’을 뜻합니다. 사(辭)는 ‘말’이라고 풀어도 좋고, ‘하소연’이라고 풀어도 좋습니다. 진실하지 못한 사람이 하는 하소연이므로 ‘거짓말’이라고 보아도 좋습니다. 

‘대외민지(大畏民志)’는 학자에 따라서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위나라의 왕필(王弼)은 이 구절을 『주역(周易)』에서 온 것으로 보고 ‘모시(謀始)’, 즉 일의 처음을 잘 도모하는 것, 즉 좋은 제도를 마련하는 것으로 풀이했습니다. 그러면 이 문장은 정치하는 사람이 계약 등을 잘 관리해 일을 잘 처리하면 백성들이 쓸데없이 송사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한나라 때 정현은 이 구절을 거짓 뜻을 품은 사람들을 크게 두렵게 하여 그 뜻을 성실하게 만들면 감히 송사가 없을 것이라고 풀이했습니다. 이때 ‘민(民)’은 앞에 나오는 ‘무정자(無情者)’를 말합니다. 주희는 나의 밝은 덕을 이미 밝히고 나면, 자연스럽게 두려워하고 복종함이 백성들의 마음에 생길 것이라고 풀이했습니다.

정현에 따르면, 여기에서 본(本)은 뜻을 정성스럽게 하는 것[誠意]을 가리킵니다. 심경호는 “위정자가 수신과 덕치로 백성의 마음을 크게 두렵게 만드는 효과[大畏民志]를 얻는 것”을 지본(知本, 근본을 앎)이라고 한 것으로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