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경』에 이르기를, “저 기수(淇水)의 물굽이를 쳐다보니, 조개풀[菉竹]이 아름답고 아름답구나. 멋있는 군자여, 잘라놓은 것 같고 다듬는 것 같고 쪼는 것 같고 가는 것 같다. 엄숙하구나, 넉넉하구나, 빛나는구나, 의젓하구나. 멋있는 군자여, 끝내 잊을 수 없구나!”라고 했다. 자르는 것 같고 다듬는 것 같다는 말은 배움을 말하는 것이요, 쪼는 것 같고 가는 것 같다는 말은 스스로 닦는다는 것이다. 엄숙하구나, 넉넉하구나 하는 말은 두려워 떨림이요, 빛나는구나, 의젓하구나 하는 말은 위엄 있어 본받을 만함이다. 멋있는 군자여, 끝내 잊을 수 없구나 하는 말은 풍성한 덕과 지극한 선함을 백성들이 잊을 수 없음을 말함이다.
詩云, 瞻彼淇澳, 菉竹猗猗. 有斐君子, 如切如磋, 如琢如磨. 瑟兮僩兮, 赫兮喧兮. 有斐君子, 終不可諠兮! 如切如磋者, 道學也, 如琢如磨者, 自脩也, 瑟兮僩兮者, 恂慄也, 赫兮喧兮者, 威儀也, 有斐君子, 終不可諠兮者, 道盛德至善, 民之不能忘也.
어제까지 읽은 문장이 ‘지어지선(止於至善)’에서 ‘지(止)’를 주석한 것이라면, 오늘 읽는 문장은 ‘지선(至善)’을 설명하는 문장입니다. 고본 『대학』에서는 이 자리에 있지 않았지만, 주희는 이 구절이 ‘지선’을 설명한다고 생각해서 이곳으로 옮겨서 순서를 세웠습니다. 한 구절씩 읽어 나가겠습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저 기수(淇水)의 물굽이를 쳐다보니, 조개풀[菉竹]이 아름답고 아름답구나. 멋있는 군자여, 잘라놓은 것 같고 다듬는 것 같고 쪼는 것 같고 가는 것 같다. 엄숙하구나, 넉넉하구나, 빛나는구나, 의젓하구나. 멋있는 군자여, 끝내 잊을 수 없구나!”라고 했다. 詩云, 瞻彼淇澳, 菉竹猗猗. 有斐君子, 如切如磋, 如琢如磨. 瑟兮僩兮, 赫兮喧兮. 有斐君子, 終不可諠兮!
이 구절은 『시경』 「위풍(衛風)」 편에 나오는 「기욱(淇澳)」이라는 시입니다. 이 시는 흔히 위(衛)나라 무공(武公)의 덕을 칭송하는 노래로 알려져 있습니다. 위나라는 지난번에 배웠던 상(商)의 유민을 잘 다독이라는 당부와 함께 분봉된 강숙(康叔)의 나라로, 기수(淇水) 주변에 있습니다. 무공은 강숙의 덕을 이어받았다는 평을 들은 임금으로, 서주(西周)가 멸망해 동쪽으로 도읍을 옮길 때 주나라 평왕(平王)을 잘 모신 공로로 ‘공(公)’이 되었습니다.
이 시는 언뜻 보기에 상당히 어렵습니다. 『시경』에 실린 시들은 본래 민간의 노래가 많습니다. 구어로 부르던 것을 글자로 옮기고 다시 글자들을 오랜 시간에 걸쳐서 다듬고 정리한 덕분에 노래가 불리던 맥락을 모르게 된 데다 뜻은 무척이나 심오해져서 쉽게 다가오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좋은 시들이므로 차분히 뜻을 새김질해 읽다 보면 그 맛을 알 수 있습니다. 글자 풀이와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기(淇)는 황하(黃河)의 지류 중 하나인 기수(淇水)를 말합니다. 지도를 찾아보니 중국 한복판을 남북으로 흐르는 강입니다. 욱(澳)이란, 공영달에 따르면, 강가 쪽 땅이 움푹 파인 곳을 가리킵니다. 『이아(爾雅)』에서는 “물굽이[隈]”로 풀이합니다. ‘오’라고 잘못 읽는 경우가 많은데, 오로 읽으면 [솔로] 씻어 깨끗이 하다, 항만, 깊다 등의 뜻입니다. 여기에서는 맥락상 뜻이 통하지 않습니다. 녹죽(菉竹)은 흔히 ‘푸른 대나무’로 옮기곤 합니다. 당나라 때 학자 육덕명(陸德明)이 쓴 『석문(釋文)』에 따르면, 기수 주변의 백성들이 신초(藎草)를 두고 부르는 말입니다. 『본초강목』에 약재로 소개된 신초는 한국의 논둑 등에서도 흔한 풀로 잎이 조개처럼 생겼다고 해서 ‘조개풀’이라고 불립니다. 의의(猗猗)는 (주로 가느다란 것들이 모여든) 아름다움이 아주 풍성할 때 쓰는 말입니다.
이 시에서 기수(淇水)는 강숙의 덕을, 물굽이는 위나라 조정을 뜻한다고 풀이합니다. 따라서 조개풀이 아름답다는 말은 강숙의 덕을 이어받은 무공의 아름다운 정치가 위나라 조정에 널리 퍼져 있는 상태를 뜻한다고 합니다. 저로서는 이러한 딱딱한 해석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본래 그렇지는 않더라도 『대학』이란 어디까지나 엄숙한 텍스트이므로 이런 해석도 알아둘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斐)는 『시경』에는 비(匪)로 되어 있습니다. 발음이 같아서 서로 통용됩니다. 정현에 따르면, 문양을 넣어 장식한 모습을 말합니다. 사람이 학문과 수양을 통해 스스로 빛이 나도록 했다는 뜻입니다. 군자(君子)는 위나라 무왕을 가리키므로 ‘임금’으로 옮길 수도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풍(風)이란 민간에서 떠돌던 노래를 수집한 것이므로, 사랑할 만큼 멋진 사나이 정도로 생각해도 좋습니다.
다음은 절차탁마(切磋琢磨)라는 유명한 성어가 유래한 구절입니다. 학문과 덕행을 부지런히 갈고 닦는다는 뜻입니다. 『이아』에 따르면, 절(切)은 물건을 만들려고 뼈를 원하는 모양대로 자르는 일이고, 차(磋)는 상아를 돌 같은 단단한 것에 갈아서 다듬는 일이며, 탁(琢)은 옥을 모양 잡아 쪼는 일이고, 마(磨)는 돌을 문질러서 빛을 내는 일입니다. 지금 세상에서도 간단한 일은 아니지만, 옛날에는 도구가 좋지 않았던 탓에 뼈를 세밀하게 자르는 것도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 큰일이었습니다. 군자가 멋있어 보이는 까닭은 장인이 물건을 만들 때처럼, 부단히 자신을 갈고 닦아서 밝은 덕이 드러나도록 애쓰는 데 있다는 뜻입니다.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슬혜한혜(瑟兮僩兮) 혁혜훤혜(赫兮喧兮)”에서 ‘혜(兮)’는 감탄의 뜻을 나타내는 어조사입니다. 오늘날 중국어의 ‘아(啊)’와 용법이 비슷합니다. 모형(毛亨)에 따르면 ‘슬(瑟)’은 엄숙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한(僩)’은 용맹한 모습을 나타내는 말인데, 여기에서는 관대함을 뜻한다고 보기도 합니다. 공영달은 겉으로는 엄숙하고 위엄 있는 모습을 보이고 속으로는 너그럽고 여유로운 마음을 품는 것이 각각 ‘슬’과 ‘한’이라고 했습니다. 주희는 슬을 엄격하고 세밀한 모습으로, 한은 용감하고 굳센 모습으로 풀이했습니다. 읽다 보니 몸집이 단단하고 풍채는 넉넉하여 위엄 있어 보이면서도 어쩐지 푸근해 보이는 인물이 떠올랐습니다. 모형에 따르면, 혁(赫)은 밝은 덕이 휘황찬란하게 빛난다는 뜻이고, 훤(喧)은 위엄에 찬 행동거지가 뚜렷하게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공영달은 ‘혁’은 사람 안에 있는 밝은 덕이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훤’은 겉으로 드러난 위엄을 통해서 마음에 밝은 덕이 있음을 알리는 것으로 풀이했습니다. 주희는 ‘훤’은 풍성한 모습을 뜻한다고 보았습니다.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로 마음속에 품은 덕성이 겉으로 드러나서 얼굴이 맑고 행동이 발라 거리낌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첫 구절의 마지막으로 종불가훤혜(終不可諠兮)를 살피겠습니다. ‘종(終)’은 부사로 쓰이면 ‘끝내’ ‘결국에’라는 뜻입니다. ‘훤(諠)’은 ‘떠들썩하다’라는 뜻도 있지만 여기에서는 ‘잊어버리다’라는 뜻입니다. 위나라 무공의 덕 있는 정치를 잊지 않고 영원히 기리겠다는 말입니다.
이제 두 번째 부분을 읽겠습니다. 이 부분은 앞에 나오는 『시경』의 시 구절을 부연하여 풀이했습니다.
자르는 것 같고 다듬는 것 같다는 말은 배움을 말하는 것이요, 쪼는 것 같고 가는 것 같다는 말은 스스로 닦는다는 것이다. 엄숙하구나, 넉넉하구나 하는 말은 두려워 떨림이요, 빛나는구나, 의젓하구나 하는 말은 위엄 있어 본받을 만함이다. 멋있는 군자여, 끝내 잊을 수 없구나 하는 말은 풍성한 덕과 지극한 선함을 백성들이 잊을 수 없음을 말함이다. 如切如磋者, 道學也, 如琢如磨者, 自脩也, 瑟兮僩兮者, 恂慄也, 赫兮喧兮者, 威儀也, 有斐君子, 終不可諠兮者, 道盛德至善民之不能忘也.
‘도학(道學)’의 ‘도(道)’를 주희는 동사로 보고 ‘말하다’로 풀이했습니다. ‘도학’이란 ‘배움에 대해 말했다’는 뜻인데, 학문을 닦을 때 장인들이 뼈를 잘라 다듬을 때처럼 무진 애썼다는 말입니다. ‘자수(自脩)’에서 ‘수(脩)’는 흔히 고기 말린 포라고 새기는데, ‘수(修)’의 본래 글자로 원뜻은 ‘닦는다’입니다. ‘자수’는 스스로 몸을 닦는다는 말로서 장인들이 옥을 쪼고 돌을 갈 때 정성스러운 것처럼 수양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밝고 맑게 해야 함을 이야기합니다. 순율(恂慄)은 두려워 떤다는 뜻인데, 공포의 대상이어서가 아니라 삼가고 존중할 만한 대상이어서 그런 것입니다. 위의(威儀)은 [무공의 행동거지가] 위엄이 있어 본받을 만하다는 뜻입니다. 도성덕지선민지불능망야(道盛德至善民之不能忘也)에서 도(道)는 말하다는 뜻으로, 이후 문장 전체를 목적어로 삼습니다.
오늘 읽은 부분은 지극한 선에 이르기 위해 학문을 닦고 몸가짐을 바로잡는 부단한 과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도 여러 번 말했지만, 지어지선(止於至善)은 자신이 지극한 선에 못 미치면 거기에 이르도록 애쓰고 지극한 선에 이르렀으면 거기에 머무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한없는 ‘절차탁마’를 통해 덕을 풍성하게 하고 선함을 지극히 한다면 사람들이 영원히 기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정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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