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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대학 공부

[시골마을에서 대학을 읽다] 지기소지(知其所止, 그 머무를 곳을 안다)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 아침 9시부터, 홍동밝맑도서관에서 마을 사람들과 같이 사서(四書) 중 『대학』을 읽고 있습니다. 그 공부한 기록을 여기에 옮겨 적습니다. 지금 경(經)은 모두 읽고 전(傳)의 세 번째 장을 읽는 중입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나라 땅 천 리에 오직 백성들이 머무르고자 하는구나.”라고 했다. 『시경』에 이르기를, “지저귀는 노랑 새여, 언덕 귀퉁이에 머무는구나.”라고 했다. [이에 대해]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머무를 바에 있어서 그 머무를 곳을 아나니, 사람으로서 어찌 새만 같지 못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했다. 

詩云, 邦畿千里, 惟民所止. 詩云, 緡蠻黃鳥, 止于丘隅. 子曰, 於止, 知其所止, 可以人而不如鳥乎?


삼강령(三綱領) 중 지(止)의 뜻을 설명하는 구절들입니다. 고본 『대학』에는 자왈(子曰) 아래의 구절들이 뒤쪽에 있으나, 여기에서는 주자의 편집에 따라 이 자리에 놓고서 공부합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나라 땅 천 리에 오직 백성들이 머무르고자 하는구나.”라고 했다.[詩云, 邦畿千里, 惟民所止.] 

먼저 이 구절부터 공부하겠습니다. 『대학』에 나오는 시(詩)라는 표현은 모두 『시경(詩經)』을 뜻합니다. 이 구절은 「상송(商頌)」 편에 있는 「현조(玄鳥)」라는 시에서 나왔습니다. 

제목인 ‘현조(玄鳥)’란 제비를 말하는데, 은나라의 시조 설(契)은 어머니 간적(簡狄)이 제비가 떨어뜨린 알을 먹고 낳았기 때문에 이런 제목이 붙었습니다. 은나라의 중흥조인 무정(武丁)은 부열(傅說)을 얻어 정치를 혁신하고 백성을 잘 다스렸습니다. 이 시는 무정이 죽어 삼년상을 치른 후 그를 조상의 사당에 올리면서 기려서 부른 노래라고 합니다. 

기(畿)는 천자가 직접 다스리는 관할지를 말합니다. 주나라는 봉건제를 실시했기 때문에 수도에서 가까운 곳을 천자가 직접 다스리고, 먼 곳은 제후를 봉하여 대신 다스리게 한 후 필요한 세금을 바치도록 했습니다. 기는 수도 주변을 둘러싼 땅입니다. 경기도(京畿道)의 기(畿)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수도인 서울을 둘러싼 땅이라는 뜻입니다. 은나라 때에는 국경을 가리켰다고 하니, 방기(邦畿)는 나라 땅을 말합니다. 은나라는 나라 땅이 사방 천 리 정도 되는 비교적 작은 나라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止)는 여기에서 서(捿), 즉 새가 깃들여 산다는 뜻입니다. 한나라 때의 학자 정현(鄭玄) 역시 거(居), 즉 머무른다는 뜻으로 해석했습니다. 왕이 정치를 잘해서 덕이 있으면, 백성들은 오직 그 아래에서 머물러 살기를 바라고 왕이 정치를 못해서 살기 힘들어지면 백성들은 들로 산으로 흩어져 숨어 살기를 바랄 뿐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지(止)’란 백성들에게 밝은 덕을 밝혀서 백성들이 그 덕 아래에 머무르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면 자연스럽게 교화가 이루어지고 문명이 꽃피울 수 있습니다. 박세당 역시 『사변록』에서 이렇게 풀이했습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지저귀는 노랑 새여, 언덕 귀퉁이에 머무는구나.”라고 했다.[詩云, 緡蠻黃鳥, 止于丘隅.] 

두 번째로 이 구절을 읽겠습니다. 이 시는 「소아(小雅)」 편의 「면만(緜蠻)」이라는 시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황조(黃鳥)는 노랑 새, 즉 꾀꼬리를 말합니다. 우리나라에도 고구려 유리왕이 지었다는 「황조가(黃鳥歌)」가 전하고 있습니다. 동아시아에서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아름다운 새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류학적으로 꼭 이 새가 꾀꼬리를 뜻한다고 보기도 어려우므로, ‘노랑 새’로 옮길 수도 있습니다. 

‘면만(緡蠻)’은 크게 두 가지로 풀이합니다. 한나라 초의 학자로서 『시경』을 전하는 데 혁혁한 업적을 남긴 모형(毛亨)은 작디작다는 뜻으로 보았습니다. 이를 따르자면, “작디작은 꾀꼬리여”로 옮기면 됩니다. 주희는 면만이 새 우는 소리를 뜻한다고 보았습니다. 아마 꾀꼴꾀꼴 하는 꾀꼬리 소리가 중국인들 귀에는 ‘면만면만’하고 우는 것처럼 들렸나 봅니다. 이쪽을 따르자면 “꾀꼴꾀꼴 꾀꼬리여”나 “지저귀는 꾀꼬리여”나 “지저귀는 노랑 새여” 정도로 옮길 수 있습니다. 물론 어느 쪽이든 별다른 상관은 없습니다.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깃들 곳을 찾는 ‘새’ 자체이지 그 형태나 소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우(丘隅)는 『시경』 원문에는 구아(丘阿)로 나옵니다. 당나라 때의 학자인 공영달(孔穎達)은 새가 깃들여 살기 좋을 정도로 산이 깊고 숲이 울창하며 조용한 장소라고 풀이했습니다. 주희의 풀이도 크게 다르지 않아 산이 높고 숲이 울창한 곳이라고 했습니다. 새는 타고난 본성을 따라 본래 아무도 가르치지 않아도 자기가 머무를 곳을 압니다. 천지만물 중 오직 인간만이 어디서 살아야 할지 모르는 것만 같습니다. 본성을 속이며 움직이고 자연을 거슬러 사는 것이 버릇되다 보니, 지금에 와서는 본성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요. 사람은 본래 밝은 덕을 갖고 태어났으나 살아가면서 그 밝은 덕이 흐려져 어두워진 것과 같습니다. 이 구절로부터 우리는 ‘지(止)’는 저절로 머무를 것을 아는 새처럼 자신의 자연스러운 본성에 따르는 것이 곧 ‘지극한 선에 머무르는 것’임을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마지막 구절을 읽겠습니다. 

[이에 대해]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머무를 바에 있어서 그 머무를 곳을 아나니, 사람으로서 어찌 새만 같지 못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했다.[子曰, 於止, 知其所止, 可以人而不如鳥乎?]

『대학』에서 나오는 ‘자(子)’는 모두 공자를 가리킵니다. 공자가 앞에 나오는 『시경』 구절을 풀이한 것입니다. 이 구절이 앞의 두 구절을 모두 포괄하는 것인지, 아니면 뒤 구절만 풀이한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게다가 이 구절 다음에도 ‘지(止)’를 풀이한 글이 계속 나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독립해서 보지 않고, ‘지우구우(止于丘隅)’에 이어진 것으로 대개 봅니다. 고본 『대학』에서는 본래 이 구절이 “사람들과 더불어 사귈 때에는 믿음에 머무른다[與國人交止於信]”는 구절 뒤에 있습니다. 『대학』 전(傳)의 구조는 경에서 인용한 구절들이 먼저 나온 다음에 이를 종결하는 말로 끝난다는 것을 고려하면 사실 이렇게 고본에 따라서 읽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텍스트 비평은 제가 할 일이 아니므로, 여기에서는 일단 주희가 정리한 판본을 따라서 읽으려 합니다. 

‘어지(於止)’는 대개 “머무를 바에 있어서”나 “머무를 곳에서”처럼 주제나 장소를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하는데, 황종원은 “머무름이여”라고 사람이 새만도 못한 세상에 대한 탄식으로 옮겼습니다. 주류는 아니지만 나름 운치가 있습니다.

‘지기소지(知其所止)’는 ‘그 머무를 곳을 안다’는 뜻입니다. 새들을 비롯한 세상만물은 모두 자신이 마땅히 살 곳을 압니다.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본성에 따라 저절로 압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새는 본능이 시키는 바에 따라서 늘 최선을 다해 자신이 머무를 만한 곳을 찾습니다. 새끼를 낳아 기르기에 좋은 최적의 장소를 찾아 산과 들을 헤매고 다니어서 마침내 아늑한 장소를 찾고야 맙니다. 오직 인간만이 마땅히 머물러야 할 곳에 머무르려는 부단한 노력을 중도에 그친 채 적당한 곳에서 살아갑니다. 『대학』에서는 격물(格物)에서 평천하(平天下)에 이르는 노력의 끊임없는 연쇄와 순환을 강조했으므로 이렇게 풀이하는 것도 좋습니다. 한편, ‘지기소지(知其所止)’를 도가적으로 해석해 그 멈추어야 할 경지를 적절하게 아는 ‘지족(知足)’으로 풀이할 수도 있습니다. 욕망을 끊임없이 키워서 이를 만족시키느라 애쓴 끝에 기어이 자신을 망치는 지경에 이르지 말고, 적절한 때 멈추어서 작은 즐거움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는 지극한 선에 머무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유가적 해석을 따릅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호(乎)’는 반어적 뜻을 나타내므로, ‘가이인이불여조호(可以人而不如鳥乎)’는 ‘~할 수 있겠는가’라는 반어문입니다. ‘가이(加以) A 불여(不如) B’는 A로서 B보다 못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는 사람으로서 새보다 못할 수 있다는 말이 되겠죠. 사람이 짐승만도 못한 세상, 하늘의 도를 실현하지 못하는 정치에 대한 공자의 절망을 드러냅니다. 물론 그 어조는 반어이기에 더욱 준엄합니다. 박세당은 천하에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려는 이는 지극한 선에 머무르려고 끊임없이 애써야 한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공자의 말과 관련해서 조선의 임금인 영조(英祖)는 황조(黃鳥), 즉 꾀꼬리는 오직 여름에만 운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꾀꼬리는 아무 때나 울지 않고 때에 맞추어 웁니다. 따라서 천하에 도가 있을 때에는 나타나고 천하에 도가 없을 때에는 숨는다는 뜻도 같이 함축하므로, 늘 어진 정치를 펼쳐서 사람들이 머무를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귀담을 만한 해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