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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한시

[시골마을에서 한시를 읽다] 왕수인(王守仁)의 산속에서 제자들에게(山中示諸生)

산속에서 제자들에게

왕수인(王守仁)


개울가에 앉아 흐르는 물을 바라보나니

물이 흘러감에 마음도 같이 한가롭다.

산 위에 달이 떠오르는 것도 몰랐는데,

솔 그림자 떨어져 옷 위에 얼룩지네.


山中示諸生 


溪邊坐流水, 

水流心共閑. 

不知山月上, 

松影落衣斑.



오늘 읽을 한시는 왕수인(王守仁, 1472~1529)의 「산 속에서 제자들에게 주다(山中諸示生)」라는 명나라 때 시입니다. 왕수인의 호는 양명(陽明)입니다. 양명학(陽明學)의 창시자로 앎과 함이 하나라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정신을 강조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시는 자신의 깨달음을 함축해서 전하기 위해 지었다고 합니다. 어떤 뜻에서 그런지 차분히 감상해 보겠습니다.

먼저 왕수인의 사상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그 역시 주자의 학문을 깊이 숙고하는 데에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주자를 따라서, 격물치지(格物致知)하고자 대나무를 한 주일 동안이나 꼼짝도 않고 관찰했습니다. 사물의 이치에 도달해 앎을 이룩하고자 대나무를 꼼꼼히 살핀 것입니다. 하지만 앎은 얻지 못하고 병만 얻었을 뿐입니다. 주자가 먼저 알고 나중에 행한다는 선지후행(先知後行)을 이야기한 것은 남송의 상황이 선비들의 정치 참여를 근원적으로 가로막았던 탓일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앎 자체를 추구해 지극한 진리를 밝히는 것만으로도 곧 정치에 참여하는 것일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마치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루이 알튀세가 말하는 ‘이론적 실천’과 비슷한 게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왕수인은 앎과 함을 전혀 구별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대나무를 바라보아야 이치를 얻을 수 없고, 대나무와 동떨어진 자신의 마음만 확인할 뿐이었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마음뿐입니다. 왕수인은 하늘의 이치란 마음에 본래 들어 있는 것이니, 따로 마음 밖에서 배움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사람이 본래 가지고 태어난 지혜인 양지(良知)를 행동으로 옮기면 된다고 보았습니다. 이렇게 마음의 지혜를 행하는 것을 왕수인은 양능(良能)이라고 합니다. 이는 맹자를 직접 계승한 것입니다. 맹자는 어린아이가 우물가를 향해서 기어갈 때 깜짝 놀라 그리로 뛰어가는 것은 사람이 본래 타고난 마음이라고 하여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했습니다. 어린아이가 우물가로 기어가는 이치를 따로 따지지 않고 오직 마음이 시키는 대로 이를 따르는 것이 곧 앎이고 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악한 행동을 하는 것은 타고난 양지를 따르지 않고 어리석은 지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점차 양지를 어떻게 발휘하는지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본래 타고난 마음에는 차별이 없는데, 이를 발휘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성인이나 군자가 되느냐가 결정된다는 왕수인의 사상은 언뜻 보기에는 마음의 수양을 강조하는 주희의 사상과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부단한 노력을 통해 앎에 이를 것을 강조하는 주희와 달리, 왕수인의 사상은 마음속에 있는 양지를 끄집어내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앎에 이르는 데 다른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임금이나 사대부뿐만이 아니라 따로 학문을 익히고 수양을 하지 않은 보통 사람들도 어느 순간 앎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는 학문적 우위를 도덕적인 우위로 삼아 지배계급을 이루어온 중세사회의 질서를 뒤흔들 수 있는 폭발력을 담고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양명학이 ‘사문난적(斯文亂賊)’의 굴레를 썼고, 양명학에 심취한 정제두(鄭齊斗)가 스스로 강화도로 들어가 자신을 유폐함으로써 학문의 자유를 얻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봄으로써 대나무의 이치를 알 수 있다는 양명학은 근본적으로 사물의 객관적 존재를 부정하는 주관적 관념론에 떨어질 위험이 있음을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이 같은 배경 지식을 깔고 이제부터 시로 들어가겠습니다. 먼저 제목을 살펴보겠습니다. “제생(諸生)”은 여러 제자라는 뜻입니다. 산중시제생(山中示諸生)은 산 속에서 문득 얻은 깨달음을 제자들에게 전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깨달음일까요?

유수(流水)는 ‘흐르는 물’로, 수류(水流)는 ‘물이 흐르다’로 옮깁니다. 한문은 이렇게 같은 단어라도 순서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됩니다. 첫 구 “계변좌유수(溪邊坐流水)”는 “시냇가에 앉아서 흐르는 물을 바라보다”는 뜻입니다. 누구나 한번쯤은 시냇가에서 아무 생각 없이 흐르는 물을 바라본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세상일에 시달린 온갖 번잡한 마음을 물에 실어서 어디론가 보내는 듯, 만물을 정화하는 물의 힘을 빌려 마음을 맑히는 듯, 가만히 물을 내려다보면 마음이 저절로 고요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동양에서는 물을 바라보면서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을 수양의 하나로 여겨 ‘관수(觀水)’라고 합니다. 예부터 선비들이 물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명상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들이 많이 전하는데, 이 그림들을 하나의 분류로 삼아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라고 하고, 시냇가에서 물을 바라보는 선비의 모습을 그리는 것을 청계고사(淸溪高士)라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행동 역시 문화적 뿌리를 갖춘 것이 제법 있습니다.

‘한(閑)’은 ‘한가롭다’는 말인데, 마음이 세속의 일에 매이지 않고 자유자재인 상태를 암시합니다. 물이 흘러가면서 마음도 같이 떠내려 간 것입니다. “물이 흘러감에 마음이 같이 한가롭다[水流心共閑]”라는 시구는 물과 마음이 하나로 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물을 바라보는 것은 물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곧 마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흐르는 물은 곧 마음의 흐름을 나타냅니다. 자연이 따로 있고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마음이 하나로 이어져 있으니 마음을 바라보는 것이 곧 자연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마음을 떠나보냈으므로 한가한 것이지 물이 흐르는 게 한가한 게 아닙니다. 이는 화자 자신이 자신의 마음속에 푹 잠겨서 오로지 마음만을 응시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러니 당연히 사물의 변화는 눈에 들어올 리 없습니다. 세 번째 구절이 이를 잘 보여 줍니다.

부지(不知)는 ‘알지 못한다’라고 할 수도 있고, ‘어느새’ ‘부지불식간에’ 등으로 옮길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에 푹 빠져서 세상 온갖 변화들을 잊어버렸기에 산 위에 달이 뜨는 것도 몰랐다는 뜻입니다. 진리를 향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이러한 내면적 침잠의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다른 의미에서 보면, ‘달’은 문득 떠오른 시인의 깨달음[道]를 뜻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자신의 마음에 있는 양지가 자기도 모르게 하늘 가득 떠올라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입니다. 옷에 드리운 소나무 그림자(松影落衣斑)를 보고서 왕수인은 이를 깨달았고, 그 깨달음을 시로써 제자들에게 전한 것입니다. 아름다운 득도시를 보는 것만 같습니다. 이 시에서 우리가 꼭 명심해야 할 것은 도를 깨닫기 위해서는 온갖 세상일을 떠나보내고 오직 자기 내면에만 집중하는 침잠의 시간을 우리 삶에 초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에서 ‘고요함’을 생성하는 기술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시급히 얻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