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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한시

[시골마을에서 한시를 읽다] 안수(晏殊)의 「서원(西垣)에 석류꽃이 피다[西垣榴花]」

서원(西垣)에 석류꽃이 피다

안수(晏殊)


산 나무에 달콤한 열매 달리나니,

맑은 궁중에 뿌리를 내렸구나.

시절은 꽃이 흩날려 떨어지는데,

홀로 무더운 바람 타고 피어나누나.


西垣榴花

晏殊


山木有甘實,

托根淸禁中.

歲芳搖落盡,

獨自向炎風.



안수(晏殊)는 송나라 때의 학자이자 시인입니다. 오랜 전란으로 무너진 학교의 부흥에 힘써 범중엄(范仲淹), 구양수(歐陽修) 등을 길러냈습니다. 「서원(西垣)에 석류꽃이 피다」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요즈음 같은 초여름에 읽기 좋은 시입니다. 

서원(西垣)은 서대(西臺), 즉 중서성(中書省)의 별칭입니다. 중서성은 주로 황제의 조칙을 작성하는 등 황제의 비서실 같은 기관으로 황제의 힘이 강화될 때마다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궁궐의 서쪽 담 근처에 있었으므로 서대 또는 서원이라고 불렸습니다. 석류꽃은 보통 음력 사월에 담홍색으로 피어나므로, 여름 꽃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는 화자가 어느 초여름에 궁궐 서원 근처에 핀 석류꽃을 발견하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첫 구절의 산 나무[山木]는 재야에서 학문 닦은 선비를 상징합니다. 달콤한 열매[甘實]란 직접적으로는 석류를 뜻하지만, 선비가 공부 후에 갖춘 온갖 덕을 뜻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둘째 구의 ‘탁근(托根)’은 ‘뿌리를 내리다’라는 뜻입니다. 청금중(淸禁中)은 ‘맑은 궁중’으로 옮길 수도, ‘궁중을 맑게 하다’로 옮길 수도 있습니다. 전자라면 떼 묻지 않은 선비들이 모여서 직무를 보는 서원을 상징하고, 후자라면 석류같이 아름다운 품성을 지닌 선비가 궁중의 혼탁함을 정화한다고 읽힙니다. 어느 쪽이든 황제의 뜻을 받들어 정치를 바로잡는 청론(淸論)을 일으키는 역할이 서원에 부여되어 있음을 암시합니다. 석류꽃이 향기를 내어 궁중을 맑게 한다고 읽는 편도 좋습니다.

셋째 구는 초여름이 되면서 봄에 화려하게 피었던 꽃들이 모두 져서 사라진 상황을 보여줍니다. 좋은 시절에는 모두 꽃피어 다툴 듯이 자신을 자랑하던 이들이 어느새 모두 사라지고, 교화를 진작할 기풍을 가진 선비들이 자취를 감춘 세태를 준엄하게 고발하는 듯합니다. 

마지막 구절은 불꽃처럼 무더운 여름에도 홀로 향기로운 꽃을 피운 석류나무를 환기함으로써, 어려운 시절에도 자신을 잃지 않고 변함없이 향기를 발하는 선비의 고고한 정신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봄에는 매화(梅花)가, 여름에는 난초(蘭草)가 선비의 절개를 상징하는 꽃인데, 이 시에서는 난초 대신에 석류꽃에 마음을 기탁한 것이 특이해 보입니다. 그러나 애써서 정치적 암시를 드러내려 하지 않고, 초여름에 홀로 꽃을 피운 석류나무의 아름다움을 찬미한 시로 읽어도 그 여운이 전혀 가시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