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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절각획선(切角劃線)

담백한 글 『무미예찬』과 뜨거운 글 『혁명――광활한 인간 정도전』을 읽다

 

조금은 무기력한 주말이다. 안으로 밖으로 번잡한 생각이 많아 하루 종일 집중하기 어려웠다. 아침에는 심경호 교수의 동양 고전 강의 ―― 논어(민음사, 2013)를 읽고, 한낮에는 정민 선생의 우리 한시 300(김영사, 2014)를 읽고, 저녁에는 괴테 시 전집(전영애 옮김, 민음사, 2009)를 읽었으나, 한온(寒溫)을 오락가락하는 날씨 탓인지 중년의 절정으로 치닫는 나이 탓인지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월요일 아침까지 YES 24에 보낼 글을 한 편 써야 하는데, 생각만 굴릴 뿐 손조차 내밀지 못하고 있다.

개인적인 번역서 한 권을 내는 문제로 새물결의 조형준 형과 대학로에서 만나 온갖 수다를 떨었다. 형은 뉴욕에서 두 해 정도 살다가 돌아온 지 열흘쯤 되었는데, 외국물을 길게 먹은 덕분인지 세상을 바라보는 사유의 깊이와 너비가 훨씬 거대해졌다. 즐거운 만남이었다. 곧 나올 내 책을 위해 기꺼이 건배!!!

박형서의 자정의 픽션(문학과지성사, 2006)은 여전히 흥미진진하다. 그러나 흔히 이야기되는 것과는 달리, 아마도 이 작가의 재능은 유쾌함이 아니라 전락하는 삶에 대한 깊은 애도에 있을지도 모른다. 슬퍼서 웃음이 나오는 큰 역설. 고구해 볼 주제다.

이중톈의 이중톈, 사람을 말하다(심규호 옮김, 중앙북스, 2013)는 틈틈이, 생각날 때마다, 세 번 눈에 띄면 손에 들고 한 챕터쯤 읽는 책이다. 여기에서 사람이란 중국인, 그러니까 동양적인 인간이다. 이중톈의 글은 정말 재미있고 명료해서 오히려 잦은 접근을 미루게 만든다. 읽고 한참 따지고 뒤져 보고 생각한 후에야 다음 글을 읽도록 하는 것이다. 아마 이 책이 강연 원고인 탓도 클 것이다. 위진(魏晋)의 풍도(風道)까지 읽었으니, 이제 마지막 한 챕터만 남았다. 새로 알게 된 사실, 이 부분은 충격적이었다. 유비가 어렸을 때 짚신을 삼고, 나중에 예주목이 되어서도 짚신을 삼은 것은 완혹(玩酷)’, 그러니까 상류층 사람이 하류층 사람의 일을 흉내 내어 즐기는 것이 우아한 처세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으로, 이 부분에 대한 연구 논문들을 찾아봐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프랑수아 줄리앵의 무미예찬(최애리 옮김, 산책자, 2010)은 대단히 잘 쓴 책이지만, 서양학자들이 동양적 사유에 대해 말할 때 흔히 보이곤 하는, 초점이 살짝 덜 맞추어진 듯한 느낌도 든다. 우리가 이미 몸에 새긴 채로 느끼고 살아가는 것을 깊이 추구하면서 들여다보는 현미경적 시선은 감동적이지만 시야가 조금 좁아 보이는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이 책에서 내 흥미를 계속 끄는 것은 ()’ 또는 무미(無味)’로써 동양적 사유의 구슬들을 실 하나로 꿰려고 하는 그 야심찬 시도가 아니라 이를 플라톤, 키케로, 아리스토텔레스 등 서양적 사유의 근원들과 대비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정말로 대단하다고 느끼는 것은 최애리 선생의 공들인 역주들이다. 줄리앵이 인용한 중국 원문을 일일이 한글 번역본과 원문을 찾아서 소개해 주로 달아 둔 부분이 없었다면 이 책에 대한 접근은 훨씬 힘들어졌을 것이다. 번역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탁환의 혁명 ―― 광활한 인간 정도전(2, 민음사, 2014)은 읽어 가면서 역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를 정밀하게 이야기하면서 이만한 문자향을 불어 넣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스러져 가는 고려와 다가오는 조선을 앞두고 국가란 무엇인가, 정치란 무엇인가, 백성이란 무엇인가를 두고 번뇌했던 선비 정도전의 내면을 이처럼 치열하게 그려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쇄말했던 재능이 다시 한 번 빛을 발한 느낌이다. 기전체로서 사건을 획득하고, 일기체로서 행간의 고뇌를 되살리는 새로운 실험이 하나의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다. 좋은 소설이다.

 

 

(1) 이디스 그로스먼의 번역 예찬(공진호 옮김, 현암사, 2014) 중에서

 


대화 부분의 문법을 손보는 데서 만족하지 못한 교정자는 제멋대로 문체를 바꾸어 놓았다. 그래서 책이 온통 원작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마드리드 말로 땜질이 되었다. (마르케스) 이는 정말 어려운 문제다. 문장이 한 작가의 문체에 해당하는 것인지, 문법 오류에 해당하는 것인지는 늘 편집자를 초기 단계에서 괴롭히는 문제다. 그러나 편집자는 저자나 번역자의 문장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작업하는 것이 원칙이다. , 한국어는 아직 우아하게 안정되지 않았고, 혼돈 속에서 방향을 잡아 가고 있음을 늘 고려해야 한다. 편집이 서로를 존중하는 대화로 이어져야 하는 것은 이 때문에 필수적인 일이다.

번역이 시나 소설, 극작과는 완전히 분리된 별개의 장르가 되어야 하는 게 당연하다. (57)

번역은 언어와 언어 간 의미의 이동이 아니라 두 언어가 주고받는 문답이다.(페비어) (59)

독자는 항상 진본을 원한다. 이것은 19세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낭만주의적 집착이다. (60)

번역이란 창문을 열어 빛을 들이는 일이요, 껍질을 깨 알맹이를 먹이는 일이며, 휘장을 거두어 지성소를 들여다보게 해 주는 일이요, 우물의 덮개를 거두어 물을 긷게 해 주는 일이로다. (킹 제임스 성경의 번역자들) (61)

압제적 정권은 언어를 지배하고 부패시키고 무력하게 만들기를 좋아합니다. 독재 정권은 구어와 문어의 통로를 통제하고 금지하고 제한하려고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며, 대개는 성공을 거둡니다. (64)

번역은 이상한 기술입니다. 일반적으로 작가들은 고마움을 인정하고, 출판사들은 그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학계에서는 사소한 일로 여기고, 서평가들은 사실상 그 존재를 무시합니다. (75)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에서 (중략) 번역은 문학의 일부였다.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문학 전통과 창조물을 전달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로버트 웩슬리) (75)

인간의 과업은 성취될 수 없다. 인간의 운명은 꾀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고, 단지 하나의 의도로 산 이상향으로 지내는 것이다. 인간은 항상 실패를 향하여 행진한다. 교전하기도 전에 이미 관자놀이에 상처를 입고 있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 (79)

살아 있는 말은 불량한 십대처럼 자기가 만들지 않은 사회적, 정치적 세상이나 학자가 설정한 경계를 압박하며 끊임없이 반항합니다. 그 말은 점잖은 낱말, 적합한 구성, 허용되는 구문의 축적 그 이상임이 분명합니다. (80)

[‘번역투] 실패한 번역가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며, 언어의 세계에서는 실체가 없는 산물, 착상이 그릇된, 충실하지 않은, 의도와는 달리 종종 희극적인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81)

번역가의 충실함은 어휘의 짝짓기가 아니라 문맥에서 드러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중략) 어떤 방식으로 하든 원문을 그대로 복제하려는 시도는 그릇된 것이며, 그래서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83)

원작의 힘이나 정신을 살려 번역하고자 하면 원작자의 말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번역가는 총력을 기울여 원작자의 특징과 맛을, 주제의 본질을, 해당 예술이나 주제에 관한 용어를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 그런 다음, 그렇게 이해한 것을 원작을 쓰듯 적절하고 생생하게 표현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단어에 단어를 하나씩 대응시켜 옮기면 원작의 정신이 그 지루한 수혈 과정에서 모두 상실된다. (존 드라이든) (84)

번역문은 원작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게 분명한 듯합니다. 다른 언어로 쓰였다는 이유만으로도 말입니다. (87)

내면의 경험이나 상상의 상태를 외적인 세계로 전사하거나 필사하는 게 문학 창작이라면, 작가는 독자와 같은 언어를 쓴다고 하더라도 번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89)

― 『돈키호테는 문학 작품이며, 문학 번역가로서 제게 중요한 것은 번역물인 동시에 문학이라고 불릴 수 있는 작품을 영어로 쓰는 것이었습니다. (100)

 

 

(2) 프랑수아 줄리앵의 무미예찬(최애리 옮김, 산책자, 2010)에서


 

()의 유일한 특성은 두드러진 특성이 없는 것이요, 은미(隱微)하고 절제된 것이니, 그것을 환기하기 위해서는 재량하려 드는 시도를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8~9)

사물의 단순함이야말로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9)

중국 문화에서는 무미(無味)가 하나의 가치로 인정된다. 그것도 가운데(), 바탕()을 이루는 가치로 말이다. (11)

의미는 결코 완결되지 않으며 항상 열려 있다. 그렇기에 독서 기술, 즉 의미가 서서히 우러나게 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중략) 자신 안에서 가능한 모든 의미가 자유롭게 풀어지도록 하는 것, 은밀한 내적 요구에 귀 기울이고 항상, 무한히 갱신되는 여정에로 나서는 것이 필요하다. (20)

맛은 우리를 얽어매지만, 맛없음은 우리를 풀어주는 것이다. (33)

텅 비고 고요하고 무심하고 무감각하며 무위한 것, 무미하고 초연한 것이 현실의 기초를 이루며 모든 삶에 기조가 된다. (35)

고대 중국 사상이 현실에 접근하는 관점은 진실로 존재하며 결코 변하지 않는 것(물자체, 이데아)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변화에 내재하며 생성에 그 변전의 논리를 부여하는 일관성을 묻는 것이다. (38)

아리스토텔레스의 중간은 단지 윤리적인 것이며, 따라서 정념행동의 영역에서만 유효하기 때문이다. 유교의 이상인 중용은 세계와 인간 모두의 근본적인 중립성에 대한 인식에 기초해 있다. (40)

단순함평범함은 진정성의 보장이다. (43)

진정한 맛이란 대번에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분명히 퍼져나가는 상태임을 뜻한다. 가장 절제할 때 가장 큰 호소력이 나오는 것이다. (44)

맛없음(無味)만이 다섯 가지 맛(五味), 즉 시고 쓰고 달고 맵고 짠 맛을 공존하게 해 주는바, “맛이 쓰면 동시에 달 수 없으며, 맛이 시면 동시에 짤 수 없다.” (52~53)

덧없는 인상,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영속성, 순수성, 정신적 차원, 그리고 황량한 잿빛 분위기’. 이 모든 것이 예술작품 가운데 자리 잡기 시작하는 담백함이라는 기호의 보완적 면모이다. (59)

절제함으로써 한층 더 확장되는, 삼감으로써 다함이 없게 되는, 이런 맛이나 소리는 물리적 실현에서 미처 이루지 못한 것을 정신적 현존에서 성취한다. (63)

음의 물리적 차원은 어떤 초월적 질서나 초자연적 음악을 위해 지양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넘어 침묵 가운데 심화되기 위해 자리를 내주는 것이다. (68)

 

 

(3) 김탁환의 혁명 1 ―― 광활한 인간 정도전(민음사, 2014) 중에서

 

바꿀 수 없는 소용돌이가 있기에 인생은 탐구하고 도전할 만한 무엇이다. (19)

사람이 새로워지지 않고는 나라도 새로워지지 않는다.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은 아니다. (19)

누구나 외로움 밴 물음을 몇 개쯤은 품고 산다. 그러나 대부분은 모른다, 정녕 외로움에 풍덩 빠질 때란 스스로 답할 수밖에 없는데도 물음을 던지는 순간임을. 답을 해도 달라지는 것이 쥐뿔도 없는, 지금처럼. (32~33)

()을 해치는 자를 적()이라 하옵고, ()를 해치는 자를 잔()이라 하옵니다. 용상에 앉아 있다고 하더라도 잔적(殘賊)에 이른 자를 왕이라 칭하긴 어렵사옵니다. 그러므로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를 죽인 것은 신하가 왕을 시해한 것이 아니라 인간 망종인 잔적을 없앤 것에 지나지 않사옵니다. (41)

땅을 일구는 백성이 행복하지 않고는 어떤 정책도 헛되다. (45)

누구에게는 날갯짓 한 번에 깨는 악몽이 누구에게는 헤어나기 어려운 현실이다. 이 현실을 바꾸지 못하는 혁명은 혁명이 아니다. 출세욕이며 찬탈이다. (58)

남자에겐 끼니를 잇고도 남는 곡식이 있고 여자에겐 겨울 추위를 막고도 남은 옷감이 있다면, 부모를 섬기고 자식을 기르기에 넉넉하다면, 누구나 예의를 갖출 것이오. 장졸을 이끌고 전쟁터로 나서지 않더라도 세상의 모든 도적들이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76~77)

봄은 봄의 출생이고 여름은 봄의 성장이며 가을은 봄의 성숙이고 겨울은 봄의 수장(收藏)일지니, 봄을 모르고 대체 무엇을 알겠는가. (88)


절각획선(切角劃線) - 2014 2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