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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마사 누스바움, 『시적 정의』(박용준 옮김, 궁리, 2013)를 읽다


『시적 정의』


올 가을에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 중 하나가 마사 누스바움의 『시적 정의』(박용준 옮김, 궁리, 2013)이다. 이 책은 세계적인 법 철학자로 정치 철학의 대가인 누스바움이 시카고 대학 학생들과 함께 진행한 ‘법과 문학’이라는 강의의 결과물이다. 

이 책의 중심에는 “좋은 시민이 되는 데 왜 문학을 읽는 것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이 놓여 있다. 누스바움은 찰스 디킨스의 소설 『어려운 시절』을 밑 텍스트로 삼아 이 질문에 뒤따르는 여러 문제를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풀어 간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문학의 힘은 독자들에게 타자의 삶에 대한 공감하도록 하는 능력에 있다. 나와는 다른 삶의 조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상상하고 그에 대해 연민을 느끼는 것은 사회공동체 속에서 성숙한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능력이다. 요컨대, 문학적 상상력은 “우리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타인의 좋음(good)에 관심을 갖도록 요청하는 윤리적 태도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이것이 우리가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이런 강의를 들을 수 있다면 기꺼이 학교를 또다시 다니고 싶어질 것이다. 문학이 없다면 시민도 없다. 민주주의도 없다. 자유도 없고, 평등도 없다. 타자의 삶을 구체적이고 개별적으로, 그러나 총체적이고 전면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문학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모든 이들에게, 법과 정치와 경제를 이해하려는 모든 이들에게, 그러니까 정말로 모든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 책 속에서 =================

문예가란 정치에 깊이 참여하는 자이다. 시인은 다양성의 중재자이자 자신의 시대와 영토의 형평을 맞추는 자이다.(휘트먼) (11쪽)

내가 문학적 상상력을 옹호하는 정확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타인의 좋음(good)에 관심을 갖도록 요청하는 윤리적 태도의 필수적인 요소로 보이기 때문이다. (16쪽)

헨리 제임스가 말했듯, 공적인 삶에 있어서 문학적 상상력의 과제는 "그 어떠한 것보다 더 나은 기쁨이 없을 때, 최상의 것을 창조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고귀하고 구현 가능한 경우를 상상하는 것이다." (20쪽)

삶이란 총합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한 폭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올리번 웬델 홈스) (21쪽)

문학은 그 구조와 화법에 있어 정치경제학의 텍스트들 속에 담긴 세계관과는 양립할 수 없는 삶의 의미를 표현하며, 어떤 면에서는 합리성의 과학적 기준을 전복시키는 욕망과 상상력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 (26쪽)

좋은 문학은 우리에게 격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불안을 야기하며, 당혹스럽게 만든다. (33쪽)

소설은 상대주의적이지 않으면서, 맥락 의존적이고 윤리적인 추론의 한 양식에 대한 패러다임을 구축한다. (39쪽)

소설의 기여가 정치적으로 결실을 맺으려면, 다른 독자와의 대화가 요구되며, 도덕 및 정치 이론의 여러 입장을 반영한 소통을 통해 소설 자체를 윤리적으로 평가하는 작업 역시 필요하다. (43쪽)

경제학은 디킨스의 작품과 같은 소설이 상상력을 통해 보여주는 인간에 대한 지식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경제학은 보다 복합적이면서 철학적으로 타당한 토대들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45쪽)

[소설이 다른 많은 서사 장르와 공유하는 특징] 인간의 개별성에 대한 존중과 질적인 것으로부터 양적인 것으로의 환원불가능성에 대한 인정, 세계에서 개인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매우 중요하다는 인식, 그리고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마치 개미나 기계 부품의 움직임이나 동작같이 객관적인 외부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가 자신의 삶에 다층적인 의미를 부여하듯 삶 속에서 우러나오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묘사 등이 그것이다. 소설은 다른 많은 서사 장르들보다 내적 세계의 풍부함을 훨씬 더 탁월하게 다루며, 수많은 구체적인 맥락 속의 모든 모험을 통해 삶이 주는 도덕적 의미까지도 구현한다. 이와 같이 소설은 다른 장르에 비해 환원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경제학적 방식에 철저히 반대하며, 질적인 차이들에 더 주목한다. (83쪽)

경제 교과서만으로 길러진 인간은 노동자들(사실상 그 어떤 타인들까지도)을 자신만의 삶의 이야기를 가진 온전한 인간 존재로 생각하도록 고취된 적이 없었다. (84쪽)

개인적 삶이 갖는 복잡한 특징을 강조하고 개인들 간의 차이를 부각하는 방법은 단순히 유토피아적인 정치적 해결 방식을 지양하고, 자유를 강조하면서 다양성을 존중하는 접근 방식을 제시한다. (86쪽) 

생각 속에서 노동자들을 비인간화하는 것, 그리고 그들로부터 인간 삶이 불러일으키는 경이로움을 부인하는 것은 훨씬 쉬운 일이다. (87쪽)

소설의 도덕적 기제는 심미적 탁월함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로 하여금 노동자들과 결속하도록 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지루한 소설은 이와 같은 도덕적 힘을 갖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흥미를 위한 관심 유발 자체가 도덕적 특징이 되는 것이다. (88쪽)

디킨스는 모든 인간의 삶은 사실 너머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 다양한 공상들을 수용하는 것, 우리 자신의 정서들과 내적 활동들을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인식하는 형식들에 투영하는 것(그리고 우리 자신, 즉 우리의 내적 세계에 대한 이미지들의 이러한 상호작용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94쪽)

우리 모두는 스스로 도덕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상호작용하는 한에서 허구와 메타포의 공상적 투사자이며 제작자이며 신봉자이다. (94쪽)

세계가 자갈길 같다고 하여도, 공상은 그곳에 정원이 생겨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97쪽)

이야기와 동요에서 기쁨을 느끼는 아이는 인간 삶의 모든 것이 쓸모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한다. 오로지 유용함에만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존재 그 자체로 소중하게 여길 수 있는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을 함께 배우는 것이다. (101쪽)

디킨스는 상상력을 평등하고 자유로운 시민들로 이루어진 나라의 훌륭한 정부를 위한 필수적인 기반으로 보았다. 상상력을 통해 이성은 사물에 대한 너그러운 시설을 따라 유익한 것이 되며, 이러한 너그러움 없이 이성은 차갑고 잔혹한 것이 될 것이다. (103쪽)

소설은 시간, 장소, 계급, 종교, 인종의 경계를 초월한 인간적 욕구를 인식하면서, 도덕적 숙고의 초점이 인간적 욕구가 충실히 실현되고 있는지의 여부에 맞추어지도록 한다. (107쪽)

소설 읽기는 인간적 가치에 대한 감각을 생생하게 일깨워주며, 우리를 온전한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가치판단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준다. (110쪽)

오늘날 국가의 번영을 "도표 형식"으로 비교한다면 사실상 가장 일반적인 전략은 단연코 1인당 국민총생산량(GDP)를 나열하는 것이다. 이 투박한 측정 방식은 (중략) 부와 소득의 분배에 대해 말해 주는 바가 없으며 결국 불평등이 심한 나라조차도 높은 순위에 들 수 있다. (중략) 불평등과 그로 인한 불행을 방지하는 것은 한 국가 내의 삶의 질을 측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115쪽)

감정은 문학 작품의 내용에 대한 단순한 반응이 아니다. 감정은 문학적 형식들이 관심을 이끌어내는 방식과 작품의 구조 자체에 설계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123쪽)

사랑하는 이들, 국가, 그리고 자아 밖에 있는 여타 독립적인 항목들과 관계 맺지 않고는 진정한 가치란 있을 수 없다. (132쪽)

감정은 언제나 마음 가까이에 있으며, 말하자면 1인칭 시점을 내포한다. 그래서 사랑은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커다란 가치를 부여하고, 사랑의 강도는 대개 주체와 대상 사이의 연결이나 소통이 있는지 여부에 의존한다. 또 비애는 상실에 따르는 슬픔으로서 한 개인의 삶의 뿌리가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공포는 흔히 전적으로 자기 중심적인 것이거나 친구, 가족, 연인 등을 대신하여 느끼는 것이다. 분노는 자신에 중요한 무언가에 모욕이나 해가 가해졌을 때 일어나는 감정이다. (133쪽)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만드는 것은 인간 존재의 약함이다. 우리의 마음에 인간애를 갖게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고통이다. 우리가 인간이 아니라면 인간애에 대한 의무를 지지 않을 것이다. 모든 애착은 부족함의 표시이다. ... 따라서 우리의 약함 자체에서 우리의 덧없는 행복은 생겨난다.(루소) (147쪽)

감정이 없는 지성은 가치를 보지 못한다. (151쪽)

소설 속에 구현된 공동체의 비전은 자유주의적 견해, 즉 개인들은 응당 소중하고, 자신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고 보는 시각에 근거하고 있다. (154~155쪽)

만약 우리가 심지어 정치적인 삶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사람들이 그 자신으로서 최선을 다해 살고, 그래서 필연적으로 일과 사랑과 질병과 자연적 아름다움의 복잡함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그 세계 속으로 발을 내디뎌야 한다.(레이몬드 윌리엄스) (158쪽)

가난하거나 억압받는 자들의 상황을 대하는 매우 나쁜 방식은 그것이 다르게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194쪽)

소설 읽기의 경험은 각각의 삶을 다른 삶과는 분리되고 독립된 것으로 여기도록 하는 강력한 힘을 만들어 낸다. (196쪽)

누군가가 어떤 이유에서든 공감의 상상력이라는 문학적 태도로 개인을 대할 때, 최소한 잠시 동안만이라도 인간에 대한 비인간적인 묘사가 멈출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6쪽)

문학적 이해란 사회 평등으로 이끄는 마음의 습관을 고취해 집단 증오를 지탱하던 고정관념을 해체하는 데 기여한다. (19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