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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읽기에 대하여

읽기에 헌신하는 삶을 위한 세 가지 방법



읽기는 도약대이자 진지이고 무덤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스페인 여행 이후, 나는 조금 더 삶을 단순하게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말라가의 푸르른 지중해 바다 앞에서, 문득 무엇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는가 하는 물음이 떠올랐는데, 여행 내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읽기만이 내 인생의 유일한 근거였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읽는 것이 나의 도약대이자 진지이고 무덤이어야 하는 것이다. 

편집자의 삶이란, 읽고 쓰는 일에는 오히려 지쳐 있기 마련이어서 자칫하면 진행하는 책 외에 자발적 독서가 증발하는, 읽기의 사막에 사는 데 익숙해지기 쉽다. 책을 둘러싼 수많은 전략과 전술의 난무가 읽기의 순박한 즐거움을 앗아 버리는 역설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인간 정신의 정화인 책을 다루는 편집자가 정신적 공허에 시달리는 기묘한 삶의 아이러니.

스페인에서 돌아오면서 나는 앞으로는 이런 황무지에서 더 이상 살아가지 않기로 했다. 내 삶의 기쁨이 샘솟는 원천인 읽기에 모든 힘을 집중해 쓰기로 한 것이다. 우선 읽는다. 다른 무엇보다 먼저 읽는다. 또 읽는다. 읽는다. 

지난달에 있었던 민음사 상반기 결산 워크숍에서 발표문 마지막에 “읽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무기입니다.”라고 한 것은 이런 결심을 주변 사람들에게 공개해 다지려 한 것이다. 그러나 편집자인 내 삶에서 읽는 것은 일상이면서 동시에 전쟁이다. 나는 일로서 늘 무언가를 읽지만, 동시에 읽기 위한 시간을 확보하려는 치열한 노력 없이는 아무것도 읽지 못한다. 

읽기에 오로지 헌신하는 삶으로서 자신의 삶을 창조하고, 그를 위해 신체와 정신을 단련해 가는 것, 이게 바로 편집자의 인생이다. 이 인생을 지키기 위해 7월부터 나는 세 가지를 실천하고 있다.


1. 영화와 텔레비전을 무조건, 거의 보지 않는다. 본래부터 별다르게 즐기지 않았지만, 이로써 일주일에 열 시간가량 읽는 시간을 확보했다. 빠르게 읽으면 두꺼운 인문서 한 권이나 소설책 또는 시집 두세 권 정도는 충분히 읽을 수 있다.

2. 지하철, 버스 등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한다. 아침에 읽는 책과 저녁에 읽는 책을 따로 챙겨서 가방에 넣고 다니는데, 하루에 두 시간 정도 시간을 읽는 시간을 만들 수 있다. 아침에는 주로 사상서를 읽고, 저녁에는 주로 소설이나 시집을 읽는데, 일주일이면 대개 두 권 정도 책을 뗄 수 있다.

3. 네이버나 다음의 첫 화면을 이용하지 않는다. 필요한 자료의 검색은 네이버SE구글을 이용한다. 필요한 뉴스는 종이 신문, 플립보드, RSS 순으로 확인해 간다. 실시간으로 알아야 할 만큼 중요한 뉴스는 실제로 그다지 많지 않고, 그런 뉴스는 가족이나 직장 동료들이 귀띔해 준다. 이로써 회사에서 책을 읽는 시간이 대폭 늘어났다. 하루에 한두 시간 정도는 정말 거뜬하다. 일주일에 고전 한 권 정도는 당연히 읽을 수 있다.


출퇴근 지하철 풍경은 스마트하다. 모두 전화기에 코를 박고 무언가를 즐기고 있다. 카카오톡 잡담, 텔레비전 시청, 영화 관람, 고스톱 등의 게임에 몰입하는 중이다. 의미 없는 시간의 일상적 소모. 이곳에 삶에 대한 성찰은 없다. 모두가 말초 신경의 법칙에 따라 살아가는 데카당스적 풍경. 아무도 자기를 배려하지 않는다. 정신의 진정한 세기말이다. 

그러나 나는 반시대적 인간으로, 호모 레겐스(Homo Regens)로서 살 것이다. 나는 읽었고, 읽고 있으며, 읽을 것이다. 읽기의 영원 회귀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