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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카프카, 『그리운 친구여 ― 카프카의 편지 100선』(서용좌 옮김, 아인북스, 2011)를 읽다


카프카의 편지 모음집 『그리운 친구여 ― 카프카의 편지 100선』(서용좌 옮김, 아인북스, 2011)을 읽다. 1900년 김나지움에 다니던 열일곱 살 때부터 1924년 마흔한 살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카프카는 수많은 편지를 썼다. 이 책은 독문학자 서용좌 교수가 그중 100편을 가려 뽑아 옮긴 것이다. 사실 나는 이 책에 그다지 큰 재미를 붙이지 못했지만, 어떤 오기로 중간에 그만두지 않고 끝까지 읽었다. 

문학에서는 위대한 사내였지만 일상에서는 그저 찌질한 남자에 소심한 불평쟁이에 지나지 않았던 카프카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는 기쁨은 있었으나, 평생의 절친 막스 브로트를 비롯해 펠리체 바우어, 그레테 블로흐 등 카프카의 여자들과 주고받은 편지는 대개는 지나치게 사적이고 지엽적이어서 관련 정보가 그다지 없는 나로서는 쉽게 몰입하기 어려웠다. 군데군데 천재의 날카로운 통찰이 번득이는 구절들이 없었다면, 아마도 끝까지 읽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독일문학을 편집하는 회사 후배에 따르면, 이 편지들에는 사실 카프카 문학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열쇠 구실을 하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숨어 있어서 연구자들한테는 상당히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박웅현 때문에 유명해진 "책은 도끼다"라는 말이 어느 맥락에서 나왔는지를 확인한 것이 흥미로웠다. 이 말은 스물한 살 때 친구 오스카 플라크한테 보낸 편지에서 나온 말이다. 당시에 카프카는 프리드리히 헤벨의 1000쪽에 달하는 『일기』를 읽고 상당히 정신적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그 와중에 친구 오스카가 "책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준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자 젊은 혈기에 발끈해서 이런 말로 쏘아붙인 것이다. 다소 치기 어린 데가 있으나 역시 천재가 번득이는 멋진 문장이다. 아래에 읽으면서 밑줄쳐 둔 구절들을 옮겨 둔다.


=== 책 속에서


만약 우리가 자신 앞에서 말로써 속을 채워 넣을 수 있다면 그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 자신을 말로 치장하고 장식할 수 있다면 그것은 훨씬 더 좋은 일이다. 

― 고통스러운 저녁 광기에 이어 서늘한 아침의 후기.

― 양심이 폭넓은 상처를 입게 되면 그것은 좋은 일이야. 왜냐하면 그로 인해서 양심은 물린 데마다 더 민감해질 테니까.

― 만일 우리가 읽는 책이 주먹질로 두개골을 깨우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는단 말인가? 자네가 쓰는 식으로, 책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라고? 맙소사, 만약 책이라고는 전혀 없다면, 그 또한 우리는 정히 행복할 것. 그렇지만 우리한테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매우 고통을 주는 재앙 같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 같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멀리 숲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자살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들이지.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 친구들 무리는 오직 혁명에 있어서만 유용하지. 만일 모두 다 같이 단순히 행동하면 말이야. 그러나 만일 탁자 주위의 흩어진 불빛 아래 정도의 작은 봉기일 뿐이라면, 그들은 그것을 수포로 만들어 버리지. 

― 그날 나는 머리를 유난히도 무겁게 내려뜨리고 다녔기 때문에, 저녁에는 놀랍게도 턱이 내 가슴 속으로 자라서 들어가고 있다고 느꼈단 말일세.

― 『토니오 크뢰거』에 대해서라면 뭔가를 말해야 하는 법이다. ...... 『토니오 크뢰거』의 새로운 점은 그 대립의 발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대립에 대한 독특하고 유익한 몰두 그 자체에 있네.

 전문직이란 누구든 그것에 대결할 수 있게 되자마자 곧 무기력한 것이 되어 버린다.

― 중립성으로 인해서 변하거나 잃거나 망가지거나 잊힐 수가 없는 것.

― 찬사가 주는 손상이란 그 찬사로 인해서 그 찬사의 대상이 눌리고 상하고 또는 당혹스러울 때만이 해로운 것이다.

― 온몸이 내게 경고를 하네. 단어마다에서 그래. 단어마다 내가 미처 써 내려가기도 전에 우선 모든 방향으로 둘러보는 것이야. 그럼 모든 문장들이 와해되지. 난 그 내부를 들여다보고, 그러면 곧 중단해야 하는 거야.

― 최후의 순간까지 혼자 있으려고 해. 나 자신의 뒤를 바짝 따르는 것이 아직은 나를 뜨겁게 하는 기쁨이며, 무엇보다도 건강한 기쁨이지.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나의 내부에서 보편적 불안을 창출하며, 거기에서 비로소 유일하게 가능한 평정이 생성되는 것 아닌가.

― 내가 지금까지 써 온 것은 미지근한 목욕탕에서 쓰인 것들이고, 진짜 작가들의 영원한 지옥은 체험해 보지 못했어. 

― 인간을 향한 이 열망, 내가 지닌 이 열망이 성취되면 곧 불안으로 변하고, 휴가 동안에야 비로소 바른 길을 찾네.

― 나는 내 편지를 쓰고, 자네는 자네의 편지를. 그러면 그것은 이미 답장이요 판결이며 위안이며 절망이지. 

― 모든 참된 것은 반박될 수 없다. 반박은 안 된다. 진압이라면 몰라도.

― 독서는 음악이네. 그 대본과 음악은 본질적인 것을 가져다 주네. 자네는 그것을 마치 거인처럼 번역해 냈군. 이 반복에 불과한 것들을 정말 살아 숨쉬게끔 해냈어!

― '거짓말' 주변에서 진리의 가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은 거짓말쟁이를 위안해 줄 수 없다네.

― 수용하기 어려운 모든 느낌들, 그러니까 근대적인 원리에 의해 설치된 동물원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 거기에서는 동물들에게 완전한 자유가 주어졌다는 그 느낌을 극복하게 되면, 곧 시골 생활보다 더 쾌적하고 무엇보다도 더 이상 자유스러운 생활은 없다네.

― 누군가 "불행 중에 행복하다"면, 그것은 세상과의 공동 보조를 잃었다는 의미이지. 그리고 나아가서 매사가 그로부터 떨어져 나가 버렸거나 떨어져 나가고 있는 중이며, 어떠한 소명도 온전한 채로 그에게 더 이상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며, 그래서 어떠한 소명도 솔직하게 따를 수 없다는 것이지.

― 토마스 만은 내가 탐닉하는 작품들을 쓴 작가 중의 한 사람이야. 이 수필(「팔레스타인」) 역시 굉장한 음식이야. 하지만 그 속에 둥둥 떠 있는 후고 잘루스의 곱슬머리 숫자 때문에, 누구든 그것을 먹기보다는 감탄하게 되지. 누구든 슬픔에 차 있으면, 세상의 그 슬픈 광경을 드높이기 위해서 몸을 뻗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 언젠가는 사람이 '자신의 인격'을 필요로 하거나 또는 필요의 대상이 되리라는 것, 그러니까 그것을 준비해 두어야 한다는 희망이 항상 존재하네.

― 만일 해방의 무한한 가능성들이 없다면, 특히 우리 생의 매 순간에서 그러한 가능성들이 없다면, 그렇다면 아마도 가능성들이란 전무한 것이야. 

― 순간적 오보는 다만 그 순간의 상실만을 의미하는 것일 뿐, 전체의 상실은 아닌 게야.

― 인간적으로 서로 연결되었다는 노력의 징표, 아마도 잡지란 그 이상은 아닐 것이야.

― 참된 남편이란 이론상 이렇게 요약하려네. 아내 안에서 세계와 결혼해야 해. 그러나 아내의 저편에서 결혼해야 할 세계를 보는 그런 식으로가 아니라, 세계를 통해서 아내를 보는 것이네. 다른 모든 것은 아내의 고통이며, 그러나 아마도 저 이상적 결혼에서처럼, 바로 남편의 구원 또는 구원 가능성일 것이네.

― 분투하는 사람은 자신의 내부에 그 신성한 요소를 지키기 위해서 이 세상을 거역해야만 하네. 또는 신성한 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그 사람을 세상에 거역하도록 내세운다네. 

― 세상이 어떠하든 나는 본성으로 존속할 것이다. 그것을 세상이 좋다는 것에 알맞게 바꾸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이 발음되는 군간에 모든 존재 안에 변신이 닥친다. 그 말이 발언될 때, 마치 동화처럼 백 년 동안 마술에 걸렸던 성이 열리고, 모든 것은 생명을 얻는다. 

―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완전히 건강하면서 참된 정신 생활을 영위하는 것, 그것은 어떤 인간도 할 수 없다.

― 완전성을 향한 노력이 내게서 여자에게 이르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나에게 또한 모든 다른 것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식사, 사무실 등.

― 혼인식이란 혼인하는 당사자에게는 슬프고 절망적인 것이며, 혼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행복하고 눈이 휘둥그레지고 가슴이 뛰는 일이네. 

― 그 책(막스 브로트가 쓴 『아돌프 슈라이버 ― 한 음악가의 운명』을 말한다.)은 생존자들을 위해서 죽음에 맞서서 삶을 지니는 힘이지. 그건 마치 묘비처럼 서 있지. 그러나 동시에 삶의 기둥들처럼. 그리고 나를 가장 직접적으로 매료시킨 것은 예컨대 이런 구절이네. “자, 이제 내가 미쳤는가, 아니면 그였는가?” 여기에 바로 그 인간, 성실한 자, 불변의 영혼, 항상 열려 있는 눈, 결코 불패의 원천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 서 있는 것이네.

― 자네가 열광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이빨이 맞부딪치는 소리였지.

― 이 엄청난 무위 가운데 편지 쓰기란 나로선 일종의 활동이라네. 거의 다시 태어나는 것 같은, 세상에서의 새로운 정지 작업 같은 것.

― 고독한 행복을 불평하는데, 그럼 고독한 불행은 어떤가? 사실 그건 거의 한 쌍을 이룬다네.

― 자신 안에 파묻힌, 낯선 열쇠를 가지고서 자신 안에 고립된 한 인간이 있음을.

― 사람들이 신경이라고 부르는 것으로부터 나를 구하기 위해서 얼마 전부터 조금씩 글을 쓰기 시작했네. (중략) 그러나 그건 아무것도 아니네. 세계 대전의 와중에 손톱으로 긁어 파는 참호 같은 것.

― (고골의) 검찰관만이 명상해도 좋을 일들이 있지, 이런 마지막 문구로, “대체 내가 무슨 이야기를 했나?”

 내가 글을 쓰지 않으면 내 인생이 더 낫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네. 아마도 그렇게 되면 훨씬 더 나쁘고, 완전히 참을 수 없을 것이며, 정신 착란으로 끝날 것일세. 그러나 그것은 물로 실제로 그렇기도 하거니와 내가 글을 쓰지 않는다 해도 역시 작가이며, 글을 쓰지 않는 작가는 어쨌거나 정신착란을 부르는 괴물이라는 전제에서 하는 말이네. 하지만 작가라는 존재 자체가 어떻다는 말인가? 글쓰기는 달콤하고 신기한 보상이지, 하지만 무엇을 위해서? 밤이면 나는 어린아이의 직관 강의에서처럼 명백함으로 이 보상이 악마에 대한 봉사를 위한 것임을 느꼈지. 

― 삶에 필수적인 것은 자기 향락을 포기하는 것, 집을 경탄하고 화환을 둘러 줄 것이 아니라 집 안에 드는 것.

― 내가 연기했던 것은 실제로 일어난다. 나는 글쓰기로 인해서 나를 팔아 내몰지는 않았다. 나는 생애 동안 내내 죽었으며 이제 나는 정말로 죽을 것이다. 내 삶은 다른 이들의 삶보다 더 달콤했고, 내 죽음은 그만큼 더 처절할 것이다. 내 안의 작가는 곧 죽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인물은 지반도, 지속도 없으니까, 또 먼지에서 나온 것도 아니니까. 다만 미친 듯한 속세의 삶 속에서 약간 가능할 뿐이며, 향락욕의 구조일 뿐이니까. 이것이 작가이다. 나 자신은, 그러나, 계속 살아갈 수 없다. 살아 보지도 않았으니까. 나는 점토였다. 불꽃을 불로 일으키지 못했고, 대신 내 시신의 조명으로 이용했다.

― 깨어 있음이 아니라 망아(忘我)가 작가 존재의 첫 번째 전제 조건이다.

― 작가의 현존재는 영혼에 대한 논쟁이다.

― 작가의 현존은 실제로 책상에 의존해 있다. 작가는 본래 정신착란에서 벗어나려면 절대로 책상을 멀리해서는 안 되고, 이빨로 꽉 물고 달라붙어 있어야 하네.

― 작가는 인류의 속죄양이다. 그는 인간에게 죄를 죄 없이, 거의 죄 없이 향유하도록 허락한다.

― 나는 집을 떠나 항상 집을 향해서 글을 쓴다. 비록 집의 모든 것이 이미 오래전에 영원 속으로 헤엄쳐 들어가 버렸을지라도. 이 완전한 글쓰기는 섬의 맨 위쪽 꼭대기에 세워 둔 로빈슨 크루소의 깃발, 바로 그것이지.

― 내 걱정은 말게. 나는 소설이 존재하는 것만으로 행복하다네.

― 나는 고독의 끔찍함을 암시적으로는 알지. 고독한 고독의 끔찍함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의 고독함.

― 원칙적으로 고독은 나의 유일한 목적이기도 해. 나의 가장 큰 유혹이요, 나의 가능성.

― 교육을 기본적으로 완전히 고독한, 너무도 추운 혹은 너무도 더운 소년의 침상에서 완성했던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하고 싶을 거이야. “나는 저주받았다.” 

 “...... 그렇게 고집할 수 없는 것이, 비록 우리 모두의 대다수가” 따위의 언급에는 그 어떤 진실의 흔적도 들어 있지 않다. 

― 나는 책상 앞으로 더듬어 나아가는 대신 소파 밑에 기어가는 것을 더욱 선호했으며, 나는 여전히 그곳에서 발견되고 있다네.

― 적어도 누군가가 자신의 방을 지나가고 야수성이 그곳에서 조용히 누그러질 수 있다는 것은 빼어난 것이네.

― 허깨비들의 반어적 솔직성의 시대에 검열은 교육적인 효과가 있어.

― 예술의 본성, 예술의 현존재란 단지 그 ‘전략적 고려’만으로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실한 말의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