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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정명환의 『인상과 편견』(현대문학, 2012)을 읽다


정명환, 『인상과 편견』(현대문학, 2012).


사유의 대가와 함께 출근하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가. 아침 풍경은 정신의 빛으로 가득 차 역동적으로 꿈틀거리고, 세상은 그 이면의 깊이를 드러내면서 매혹한다. 밤의 허무에 쫓겨 한껏 느슨해져 버린 마음은 문자의 숲들 속에서 휴식과 함께 새로운 활력을 얻는다. 

그런 뜻에서 지난 두 주일 동안 정명환 선생과 함께 출근한 것은 정녕 현명한 일이었다. 연구에서 사상에 이르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현실의 뜨거운 망치질로 단련받지 않은 쇳덩이가 날카롭게 벼려지는 법은 없다. 사회과학자들이 각종 위원회나 연구소 등을 통해 현실에 직접 참여하고, 인문과학자들이 출판사를 기웃대면서 각종 잡지에 정열을 다하는 것은 이를 알기 때문이다. 나는 연구 그 자체의 논리와 윤리를 존중하지만, 현실에 참여해 보지 않은 연구자의 말에 귀 기울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

연구에서 사상에 이른 드문 대가 중 한 분으로, 『인상과 편견』을 쓴 정명환 선생은 몇 해 전 사르트르의 『말』(민음사, 2008)이 출간되었을 때, 회사 근처에서 후배 편집자 박경리와 함께 본 적이 있다. 논어의 세계, 즉 유교에 대한 광신이 조선을 망하게 했기에 자신은 젊었을 때 논어 근처에도 가지 않았고, 빨리 서구적 합리성을 받아들여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는 말씀이 귀에 남았다. 근대의 실현이 시대의 사명이자 개인의 구축이었던 세대의 표상 같은 분이었다. 어쩌면 내가 이 세대의 사유 전체를 체계적으로 들여다보고 수용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이 만남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나는 이 단단하면서도 아름다운 합리주의자에게 어느새 물들어 버렸던 것이다.

『인상과 편견』은 정명환 선생인 1952년부터 2009년까지 써 온 사유의 단편들을 모은 것이다. 출간하면서 가볍게 손보았다고는 하지만, 이 책은 한 지적 거인이 전 생애에 걸쳐 끈질기게 벌여 온 사유의 모험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 서양의 합리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그 오리엔탈리즘을 가혹하게 비판하는 것, 한국인으로서 살아가면서도 그 사유에 깃든 비합리적 신비주의와의 불화를 단호하게 선포하는 것, 그 양자의 모순을 동시에 살아간 한 지식인의 인생이 이 책을 통해서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불혹의 나이에 쓴 단상은 정명환 선생이 자기 세대의 과제를 어떻게 설정했는지, 그가 그것을 얼마나 투철하게 밀어붙였는지를 잘 보여 준다. “현재 우리의 임무는 차세대에 의한 진정한 전환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단단한 과거’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렇다. 선생의 과제는 창조였다.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해체나 재구축이 아니라 구축이었다.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먼저 구축이 있어야 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존경할 만한 스승을 갖지 못할 것이다. 근대에 대한 열정이 만들어 낸 것들을 그 찌꺼기 폐해만 보고 부정하는 것은 우물 안 개구리들의 호사스러운 노랫소리이기가 쉽다. 

가령, 나 어릴 적인 1970년대만 해도 서울 근교 산들에는 거의 나무가 없었다. 대개 민둥산이었다. 현재 우리 눈에 보이는 울창한 서울의 숲들과 근교 산들의 빽빽한 나무들은 모두 조림을 통해 만들어진 인위의 산물이다. 근대가 자연을 파괴한 것이 아니라 근대적 이성이 오히려 자연을 창조해 냈다. 이 역설이 제국의 변방에서 강점당해 식민지를 경험했던 한국의 근대이다. 정명환 선생이 문명 이전의 흔적을 한국에서 찾으려 했던 레비스트로스나 르 클레지오를 오리엔탈리스트로 공박해 거부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서구적 합리성에 대해 매개되지 않은 한국적인 것에 대한 찬양은 후진 지역을 영원히 그 상태로 머물게 하려는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이 선생의 사유를 지배한다.

한국적 전통의 비합리성과 근대 문명의 폭력을 동시에 거부하고, 그러니까 양자로부터 동시에 배척당하면서, 어쩔 수 없이 비틀거리는 방식으로만 자기의 길을 걸어 갔던 세대의 안쓰러운 분투가 눈앞에 선하게 그려진다. 할아버지 벽장 속 꿀단지를 엿본 어리석은 손자의 기분이라고나 할까. 읽는 동안 내내 두근거리고, 읽는 동안 내내 가슴이 뛰었다. 선생의 책 전체를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