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하고 나서야 약속이 생겨나는 이유를 떠올리며 소영은 아직 옷을 고르지 못했다. 자기소개는 계속 미뤄지고 있다. 이름을 잘못 선택한 것 같았다. 소영이라는 이름은 흔해서 인기가 없을 줄 알았는데 동시에 세 사람이 소영이 되어버렸다. 그들 중 영미라 불렸던 한 사람의 눈가에는 저번 生과 같은 자리에 점이 있다.
옷장의 옷들을 보며 소영은 자신의 지나간 역할을 생각했다. 소영은 소영에게 적합한 인물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이번 모임을 대하는 최선의 자세라 여겼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이 둥근 천장의 방에서는 다들 결말보단 과정의 전문가들이니까. 수년째 소영이었다는 어떤 사람은 양복을 입고 등장하더니 즉석에서 성별을 바꾸고 소영을 그만두기도 했지만.
소영은 고민했다. 무엇을 입을 것인가. 무엇을 입고 나가 무엇의 행세를 할 것인가. 자신은 왜 소영이라는 이름을 짚었을까 병일은 아버지와 닮았고 행자는 어딘지 모르게 어머니였다. 소영은 자신이 그들의 딸로 어울리면 어떡하나 망설이다가
자기소개를 떠올린다. 그 전에 입을 옷을 결정해야 한다. 체형을 결정하는 것은 그 뒤의 일. 나라와 통행의 좌우를 결정하는 것도 홍채의 색과 집 주소를 결정하는 것도. 어쩌면 소영이 망설이는 것은 립스틱의 문제일지 모르겠다. 입술은 그다음에 생겨나는 것이니까, 침묵의 완성도 그렇고.
소영은 옷장 앞에서 서성인다. 점심을 먹어야 점심때가 올 것인데 소영은 아무것도 정해진 것 없는 이번 연수가 맘에 들지 않는다. 결정하는 대로 되는 것도 아니면서 결정하지 않으면 일어서는 것 하나도 우연히 할 수 없다. 의자에 앉기 위해서도 결심은 필요하고 엉덩이는 의자보다 늦게 푹신해지니까.
소영이는 안녕? 나는 소영이야! 라고 외치고 나서 거울 속에서 얼굴이 생겨나는 걸 본다. 기분과 표정과 첫인상이 떠오르는 걸 본다. 옷을 고르기 전까지 몸은 등장하지 않고 팔들은 이제 곧 생겨날 팔목을 위해 옷장의 소매들을 힐끗거린다.
=====
황성희 시집, 『너에게 너를 돌려주는 이유』(아침달, 2024)에 실린 작품이다.
이 시의 화자는 지금 신입 사원 교육에 호출되어 있다. 어떤 나를 연출해 보여줄까를 고민하면서, 연수 기간에 사용할 이름을 고르고, 사람들 앞에 노출한 옷을 고르고, 립스틱을 바른다. 자아란, 어쩌면 신입사원 교육에 호출된 화자처럼, 어떤 사회적 조건에서 적응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시에서 소영은 나, 그러니까 우리, 정체성 불안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보통명사다. 소개할 나를 마련하지 못한 채, 잘못 선택한 기분이 드는 이름으로, 적어도 세 명과 겹치는 존재로 살고 있다. (동양에서 셋은 많다는 뜻이다.) 우리는 끝없이 이게 아닌데..... 하는 혼자말을 되뇌면서, 즉 다른 자아, 다른 삶을 갈망하면서도 최선의 자세로, 적합한 인물이 되기 위해 애쓴다.
소영이 존재하는 세계는 내면의 빛,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을 통해 인간을 바라보지 않고, 입은 옷, 바른 립스틱, 눈에 넣은 렌즈 빛깔 등 덧댄 물질에 따라서 인간을 바라본다. 그래서 시인은 말한다. "소영이 망설이는 것은 립스틱의 문제일지 모르겠다. 입술은 그다음에 생겨나는 것"이고, "옷을 고르기 전까지 몸은 등장하지 않"는다고. "안녕? 나는 소영이야! 라고 외치고 나서 거울 속에서 얼굴이 생겨나는 걸" 볼 수 있다고.
이런 세계에서 나는 도대체 무엇일까.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 걸까. 어떻게 자기를 연출하고, 자아를 연금할 것인가. 자기를 돌보고 배려할 것인가? 지금 인생 교육을 앞두고, 거울 앞에서 자기를 비추어 보면서 망설이는 화자를 통해서 시인은 우리에게 묻는다.
'평론과 서평 > 시와 에세이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원한 햇빛 외(최현우) (0) | 2025.06.08 |
---|---|
종 (임경섭) (0) | 2025.03.23 |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의 비극을 애도하다 (0) | 2025.03.02 |
조지에게(윤지양) (0) | 2025.03.02 |
롤프 디터 브링크만 (0) | 2022.0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