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차례 봄눈이 쏟아진 후, 오히려 봄기운이 부쩍 다가선 느낌이다. 중국 당나라 때 시인 한유는 「춘설(春雪)」에서 “흰 눈은 도리어 더딘 봄이 미워/ 나무 사이로 눈꽃을 흩날리는구나(白雪却嫌春色晩/ 故穿庭樹作飛花)”라고 노래했는데, 과연 이 무렵 내리는 눈은 과연 열흘 먼저 피는 매화나 다름없다. 하시라도 빨리 봄꽃을 보고 싶어 나뭇가지마다 눈으로 꽃을 빚어 매달았으니 말이다.
봄볕을 맞으려고 창문을 활짝 여니, 뒤뜰 나뭇가지마다 싹들이 비쭉비쭉 올라와 있다. 인간의 봄은 아직 오지 않았으나, 나무의 봄은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내린 눈이 녹아서 나무를 흠뻑 적시면서 물씬 향기를 쏟는다. 그리운 마음에 고개를 내밀고 숨을 한껏 들이켜 허파를 가득 채운다. 봄이 선뜻 내 속으로 들어온다.
이럴 때 읽으려고 아껴 둔 책이 미국 식물학자 데이비드 조지 해스컬의 『나무 내음을 맡는 열세 가지 방법』(에이도스 펴냄)이다. 서둘러 책을 챙겨 들고, 냉큼 뒤뜰로 뛰어나가 넘쳐나는 나무 냄새를 들이켜면서 한 장씩 책을 읽었다.
해스컬에 따르면, 냄새는 우리 안에 잠든 기억을 자극하고 억눌린 감정을 일깨우는 작용을 한다. 빛이나 소리는 지각을 정제하고 해석하는 처리 과정을 거치면서 상당히 걸러진다. 그러나 냄새는 중간 경로 없이 정서 기억을 주관하는 뇌 부위에 화살처럼 직접 꽂힌다. 한마디로, 냄새는 생각을 거르지 않는다.
냄새를 인지하는 순간, 우리 안에선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가 ‘비자발적 기억’이라고 불렀던 현상, 즉 이성의 힘으로 스스로 억누르고, 사회적 억압에 따라 차마 드러낼 수 없었던 기억이 솟구쳐 오른다. 그렇다면 냄새와 함께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야말로 그 냄새와 관계된 가장 강렬한 추억이고, 또 그때의 우리가 우리 자신의 본래 모습과 가장 가까운 모습일 테다. 그러니 냄새의 자서전을 쓸 수만 있다면, 그건 우리의 가장 진실한 전기가 될 것이다. 일찍이 마르셀 프루스트가 홍차 냄새에 이끌어 밀려드는 기억들을 모아서 수천 쪽에 달하는 기념비적 소설을 써내려갔듯이 말이다.
이 책은 미국피나무, 진토닉, 월계수, 올리브유, 책 등에서 풍기는 냄새에 담긴 개인적 추억과 함께 과학적・역사적 사실을 우리에게 안내한다. 진토닉 한 잔에서 나는 두송자, 라임, 퀴닌 냄새엔 식민지 노예 노동에 얽힌 비극의 역사가 잠겨 있고, 나무 타는 냄새엔 모닥불 주변에 둘러앉아 마음과 감정을 하나로 엮어갔던 조상들 기억이 스며 있다. 갈등과 대립을 빚는 사람들조차도 불 주위에 모이면 혈압이 낮아지고 대화가 잘 풀리는 건 우연이 아니다. 청년 시절에 경험했던 캠프 파이어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기억된다.
진정제로 쓰이는 미국피나무 향기는 “불안의 이마에 위로의 초록색 손을 얹고는 통증의 신경 경로를 안정시킨다.” 숲속을 거닐면서 나무 냄새를 맡는 일은 우리의 불안한 자아를 치료하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인류는 숲과 초원에서 진화했기에, 건강한 나무들 냄새는 언제나 우리 마음을 편하게 한다. 이번 주말엔 숲을 찾아 나무를 껴안고, 그 냄새에 취해 세상사 모든 갈등을 내려두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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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마다 쓰는 매일경제 칼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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