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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책들

책 냄새에 대하여

도서관이나 서점에 가면 내용이나 표지보다 먼저 책 냄새가 우리를 맞는다. 새 책은 새 책대로, 오래된 책은 오래된 책대로 각각 다른 냄새가 난다. 『나무 내음을 맡는 열세 가지 방법』(에이도스, 2024)에서 미국 식물학자 데이비드 조지 해스컬은 책에서 풍기는 냄새를 몇 가지로 나눈다.
흔히, 낡은 책들이 가득 쌓인 곳에 들어서면 ‘퀴퀴하고 쿰쿰한 냄새’가 나는데, 이는 사람들 눈살을 저절로 찌푸리게 한다. 푹 삭은 책들에서 풍기는 이 냄새는 사실 책 냄새가 아니다. 그건 썩어가는 책을 점령한 곰팡이들, 즉 균류의 냄새이다. 
‘코팅지로 만든 매끈매끈한 교과서’에선 정유 공장 냄새와 표백제 냄새가 섞인, 어딘가 유독할 듯한 기묘한 냄새가 풍겨온다. 그건 책장을 반짝이게 하는 광택제(폴리에틸렌 혼합물)와 책장을 백자처럼 하얗게 만드는 데 쓰는 염소 때문이다. 
‘새 페이퍼백’에선 신선한 종이에서 맡을 수 있는 깨끗한 냄새가 난다. 갓 톱질하여 말린 소나무 냄새가 은은하게 깔리고, 알싸한 잉크 향이 그 위에 생기를 더한다. 리그닌 성분을 충분히 제거하지 못한 종이는 햇빛에 산화해서 금세 누레지고 퍼석거린다. 
두꺼운 종이에 인쇄된 ‘양장본 책’에서도 페이퍼백 책들과 비슷한 냄새가 난다. 하지만 양장을 무엇으로 했느냐에 따라서 “가죽, 커피, 연기에다 심지어 달걀노른자나 거름의 기미마저 배어” 있다. 양장본 책은 저마다 다른 냄새가 나기에 책을 펼치는 행위 자체가 경이와 즐거움을 준다. 
‘오래된 책, 특히 따뜻하고 건조한 도서관에 고이 꽂혀 있는 책들’에서 풍기는 냄새가 최고다. 이런 책들에선 “훈연한 바닐라향, 진하고 풍성한 흙의 은은한 내음, 톱밥, 아몬드, 초콜릿” 같은 냄새가 난다. 오래된 책들의 냄새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감각”을 일깨운다. “책이 일상의 소란으로부터 나를 건져내어 더 깊은 시간과 더 넓고 편안한 관점으로 인도”하는 것 같다. 
놀랍게도, 오래된 책들 냄새는 아주아주 오래 우린 차나 고급 다크 초콜릿 냄새가 비슷하다. 커피와 홍차, 그리고 초콜릿은 부분적으로 리그닌과 섬유소를 건조하거나 발효하거나 가열하여 제조된다. 이는 종이의 노화에 얽힌 화학적 과정의 일부와 거의 똑같다. 
책 냄새는 종이로 이루어진 책이 서서히 기체로 변해 간다는 뜻이다. 그런데 요즘 책들은 제지 및 인쇄 기술의 발달에 따라 나무 냄새가 덜 난다. 종이의 인쇄 적성과 지면 품질을 개선하기 위해 리그닌 함량을 낮추고 한편, 콩에서 뽑은 잉크를 사용하며, 냄새가 덜한 열가소성 수지로 코팅한다. “저리그닌 중성지는 (중략) 별다른 손상 없이 몇백 년은 유지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화학적 안정성의 대가로 지금의 오래된 책들 같은 향기를 지니지는 못할 것이다.” 
흥미롭게도, 일본의 경우, 헌책 파는 상점들 냄새가 공식 인정을 받았다. 도쿄 간다의 진보초에 있는 헌책방들 냄새가 ‘환경성 선정 향기로운 풍경 100선’으로 꼽힌 것이다. 책 냄새를 활용한 마케팅도 활발하다. 영국 양초 제조사 크래프터베이터와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파월스 서점은 책의 향기를 병에 담아서 팔았다. “‘빈티지 서점 향 오일’에선 ‘나무 냄새 나는 시프르 …… 가죽, 베르가모트유, 녹색 잎, 따스한 시트러스 향’이 나고, ‘유니섹스 향’은 ‘책의 미로, 비밀의 도서관, 고대의 두루마리, 철학자 왕이 마시는 코냑’ 냄새를 불러일으킨다.” 책 향수는 책꽂이를 뒤적이는 기쁨을 떠올리게 한다. 독자들 반응은 무척 좋아서 발매되자마자 매진되었다. 
문학은 “나무, 제지 공장, 잉크 안료”를 토대 삼아 우리와 세상을 연결한다. “마야 앤절루는 어릴 적 도서관에 가서 세상을 호흡했다고 썼다. (중략) 다른 시간과 장소로부터 잉크와 종이를 타고 우리에게 찾아오는 글을 읽으면 우리의 마음은 그곳으로 실려 간다.” 책을 펼치고 냄새를 맡은 행위와 함께 “우리는 세상을 호흡한다.”
 

데이비드 조지 해스컬, 『나무 내음을 맡는 열세 가지 방법』, 노승영 옮김(에이도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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