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흔히 세책(도서 대여)과 기간제 구독과 도서관을 구분해서 생각하나, 독자 입장에서 보면 셋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책을 빌려서 읽는 일, 즉 ‘세책 독서’를 촉발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셋 모두 “책을 한곳에 모아놓고 일정 기간 사용료를 낸 이들이 마음껏 빌려 읽도록 한 유통 시스템”에 속한다. 공공도서관은 그 사용료가 무료일 뿐이다.
2
내가 번역에 참여한 『도서관의 역사』가 올해 안에 나올 텐데, 이 책에선 도서관과 서재, 공공과 사설, 무료와 유료를 구분하지 않는다. 『18세기의 세책사』(문학동네, 2024)에서도 세책점(도서대여점)을 유료 대출 도서관으로 본다.
세책점이 일반적으로 권당 대여 가격을 책정하는 반면, 밀리의서재나 네이버프리미엄 같은 기간제 구독 서비스는 기간에 따라 대여 가격을 책정한다. 후자와 같은 대여 방식은 18세기 세책점에서도 흔했다. 만화방, 웹툰/웹소설 서비스, 스트리밍 서비스, OTT 서비스 등도 넓게 보면 다 비슷한 운영 방식을 따르는 세책의 일종이다.
3
세책 독서는 독서를 확장하고, 독자를 늘리는 역할을 한다. 세책 독서 덕분에 우리는 “소수만 독서를 즐기던 사회 환경에서 벗어나 신분, 계층, 남녀, 직업에 따른 차별이나 제약 없이 독서할 수 있게 되었다.”
세책 독서를 즐기는 계층은 대부분 사회적 약자들이다. 즉, 귀하고 비싼 정보를 무료로, 또는 싼값에 즐기려는 독자들(여성, 어린이, 하층민 등)이다.
18세기 세책점은 “소수의 상층만이 독자로 책을 전유하던 시절에서 탈피해 문자를 익힌 이라면 누구나 책을 읽는 독자가 될 수 있는 시대에 등장한 서적 유통의 전진기지”였다.
세책 독서가 활발해졌다는 건 “지식인과 지배층을 중심으로 일종의 신성한 의무처럼 인식되던 독서가 이제는 누구나 여가 차원에서 향유할 수 있는 활동으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4
이에 따른 백래시는 항상 심했다. 특히, 여성이 독서를, 그것도 소설 같은 싸구려 이야기를 즐기는 현상에 대한 비난이 목소리를 높였다. 많은 남성 지식인들은 “여성이 독서를, 그것도 소설처럼 선동적인 음란한 이야기책을 좋아하는 현상을 맹비난”했다.
오늘날 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빌려 보는 소설 장르가 공공 도서관 문턱을 넘는 데는 사회적 편견을 이기고 비난을 극복하면서 오랜 시간이 걸렸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픽 노블, 라노벨 등은 아직 그 문턱을 넘지 못했다.
5
세책점 영향력이 커지면, 또 다른 비판, 즉 작가와 출판업자 쪽의 비난도 커진다. 무엇보다 세책점이 “작가와 출판사를 죽인다”라는 오늘날에도 익숙한 비판도 나타난다.
세책업은 “독서 문화 확산에 기여하고, 국민들이 독서 습관을 기르는 데 이바지했음을 칭찬”하면서도 “책을 빌려 읽는 이가 많을수록 작가와 출판사만 고통을 안아야 하는 구조가 문제임을 지적”했다. 몇 책만 있으면, 수천 명이 빌려 보면서 만족할 수 있기에, “작가는 책을 내봐야 정작 수중에 들어오는 수입은 별로 없고, 빌려 읽는 독자만 신이 나는 구조”이라는 것이다. 약자로 몰린 작가들은 책을 내기 위해 불리한 인세 조건을 받아들이는 등 각자도생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작가와 출판사가 세책점을 상대로 저작권을 부여할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의회에 제출하기도 했다. 오늘날로 말하면 대여권을 신설해서 세책점 숫자를 제어하고 대여에 따른 수익을 작가와 출판사가 돌려받거나 손실을 보전하려 한 것이다. 도서 정가제와 마찬가지로, 대중의 단기적 이익을 거슬러 정책을 추진하는 건 언제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6
세책에 따른 “새로운 독자의 출현과 뜨거운 독서 열기는 독서 문화의 질과 성격을 바꿔 놓았다.” 위르겐 하버마스에 따르면, 세책점을 통해서 “관념적·정치적·교훈적 공공 영역에서 이뤄지던 독서가 점차 가벼운 개인 영역의 독서로 바뀌”었다.
그러나 편지, 일기, 소설 등이 인기를 끌면서 작가와 출판사는 점차 이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나폴레옹 전쟁 이후, 소설 출판이 독자 변화에 발맞추어 급성장하기 시작했다.(일기체 소설, 서간체 소설의 유행을 생각해 보라.)
오늘날 도서관과 마찬가지로, 세책점이 싸구려 대중소설만 취급한 것도 아니었다. 세책점에서는 “더 비싼 문학 작품을 더 선호하고, 완전 싸구려 소설책은 취급하지 않으려 했다.” 당시 독자들이 허구를 통해 삶의 진실을 드러내는 고급 문학 작품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발 빠른 작가들(가령, 찰스 디킨스, 마크 트웨인, 에밀 졸라 등)은 논설이나 역사 같은 남성 취향 저술을 버리고 대규모 새로운 독자들을 위한 작품을 써냈다. 바야흐로 소설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오늘날에도 아마 이런 일이 생겨나고 있을 테다.
세책점이 커질수록 여기에 잘 적응하는 건 출판업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언제나 유통을 이해하는 자만이 출판 활동도 잘할 수 있는 법이다. “유럽의 큰 세책점에서는 당시 가장 인기 있는 책, 곧 소설책을 잘 만드는 출판업자의 순위를 매겨 지속해서 그 출판업자와 거래했다. 따라서 출판업자 간에 경쟁이 이루어져 출판업이 발달할 수 있었다.”
7
18세기 세책 문화를 무너뜨린 건 신문, 잡지 등 언론의 성장과 기술 발달이었다.
책보다 값싼 신문, 잡지가 대량으로 등장했다. 거기에 다양한 소식, 유익한 정보 등과 함께 소설 등이 연재되면서 독서 대중은 이제 세책 독서를 통하지 않아도 쉽게 읽기 욕구를 충족할 수 있었다. 헤겔은 말했다. “아침 신문을 읽는 것은 현실주의자의 아침 기도다.” 책이 아니어도 온 세상 정보를 얼마든지 쉽게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늘날 이 일은 인터넷과 소셜미디어가 한다.
출판업의 혁신도 18세기 세책 문화를 무너뜨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잘 알다시피, 19세기 들어서 종이, 인쇄, 제본 등 출판 기술이 급속히 발달했다. 이에 따라 책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고, 책값이 저렴해지면서 책을 사는 비용과 빌려 읽는 비용이 거의 같아졌다.
아울러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공공도서관 변화도 컸다. 처음에 성인 남성 독자를 위한 법률, 철학, 고전 등 엄숙한 장서들로 가득 찼던 공공도서관이 점차 소설 같은 가벼운 읽을거리를 제공하고, 여성과 어린이 등의 출입을 허용하면서 세책점에 갈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이에 따라서 세책점, 즉 유료 대여 도서관은 20세기 초까지 급속히 사라졌다. 현재 우리는 인터넷 등장과 함께 다시 대여 도서관 전성 시대를 맞고 있다. 아울러 공공 도서관이 작가와 출판사를 위축시킨다는 낯익은 주장도 다시 쏟아지고 있다. 공공 도서관은 이용자 숫자 감소로 고통받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영원한 사업 모델은 없다. 인간에게 지식 욕구가 있는 한, 세책이라는 행위는 사라지지 않는다. 지하철에서 옆 사람이 들여다보는 화면을 곁눈질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힐끔과 노골적의 차이가 있을 뿐, 내가 혹시 모르는 정보를 얻을 공짜로 얻을 기회니까. 18세기 작가들과 출판업자들이 소설 시장을 열고, 문고본 등 혁신 기술을 통해서, 그리고 공공 도서관의 개방을 통해서 인간의 근원적인 세책 욕구를 충족해 주었듯, 오늘날 우리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군가는 과거의 안정적 구조를 복원하려 애쓰면서 조금씩 약해지는 것이고, 누군가는 새로운 모험에 뛰어들어 무모한 기대를 현실로 바꾸어 가는 중일 뿐이다.
=====
이렇답니다.
이민희의 『18세기의 세책사』(문학동네, 2024)를 재밌게 읽는 중이다. 본문의 인용은 모두 이 책에서 한 것이다.
여러 책에서 읽어서 익숙한 이야기이긴 하나,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읽으니, 세책이라는 욕망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기회 닿으면, 대여의 역사를 다룬 책 같은 걸 기획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이나 식물에도 물건을 빌려 주고 돌려받는 문화가 존재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어쨌든 이 문화를 고도로, 집요하게 발달시켜 온 것이 인류의 중요한 특징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욕망의 문화사는 이른바 공유 경제라는 이름의 디지털 엔클로저 시대의 내적 작동 원리와 한계 등을 잘 드러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이 책은 편집자나 출판 연구자들이 읽으면서 많은 시사를 얻을 수 있는 책이다. 도서관의 역사, 서점의 역사와 함께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책에 대한 책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퍼블리싱 마케팅 트렌드 (4) | 2024.09.12 |
---|---|
출판사의 첫 책 (1) | 2024.08.11 |
옥스퍼드 출판의 미래 (1) | 2024.08.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