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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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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노소스에서 비잔티온까지 열한 군데 도시로 본 고대 그리스 새로운 분야의 공부를 시작할 때, 어떤 책을 길잡이로 삼을 것인가는 무척 중요한 문제다. 기초를 든든히 해두거나 방향을 제대로 잡아두지 못하면, 나중에 전혀 엉뚱한 곳에 가 있거나 부족한 부분을 채우느라고 더욱 큰 노력을 들이기 십상인 까닭이다. 하지만 시중에 나와 있는 많은 입문서들은 오래된 지식만 담고 있어서 별로 흥미롭지 않고, 때로는 한쪽 입장에 치우친 경우도 많아서 선뜻 권하기 힘들다. 옥스퍼드대학 출판부에서 기획한 ‘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가 나온 이래, 이러한 고민은 씻은 듯 사라졌다. 몇 년 전부터 학생들과 입문 수업을 하거나 아이들한테 첫 공부를 권하려 할 때 선뜻 추천하는 도서가 이 시리즈의 한국어 번역판인데, 주로 교유서가의 ‘첫단추 시리즈’에서 속해 있다...
조지 오웰, 그래픽 노블로 환생하다 『조지 오웰』(최정수 옮김, 마농지, 2020)은 피에르 크리스탱이 글을 쓰고 세바스티앵 베르디에 등 프랑스의 대표적 만화가들이 참여해 그림을 그린 그래픽 노블이다. 조지 오웰의 마흔여섯 해 인생을 오웰 이전의 오웰, 블레어가 오웰을 창조하다, 오웰은 누구인가 등 세 단계로 나누어서 정확하고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국내에서 오웰의 평전이 드물지만은 않다.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조오지 오웰』(탐구당, 1981)에서 존 서덜랜드의 『오웰의 코』(민음사, 2020)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출간되어 왔다. 박홍규의 『조지 오웰 : 자유, 자연, 반권력의 정신』(이학사, 2003/ 푸른들녘, 2017), 고세훈의 『조지 오웰 : 지식인에 대한 보고서』(한길사, 2012), 아거의 『조지 오웰 - 기억하는 인간, 기..
시민적 휴머니즘의 탄생 한스 바론의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위기』(임병철 옮김, 길, 2020)를 빠르게 읽었다. 재작년 아내와 피렌체를 여행한 이후, 피렌체를 다룬 책들은 어떻게든 한 번쯤 훑어 읽는 버릇이 생겼다. 언젠가 이 매력적 도시에 대한 글을 써 보기 위해서다. 이 책이 주로 다루는 시기는 1400년 전후의 피렌체다. 이 시기에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나로서는 메디치 가문을 피렌체의 지배자로 끌어올린 코시모 데 메디치 정도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세 스승은 이미 세상에 없다. 단테는 1321년에, 페트라르카는 1374년에, 보카치오는 1375년에 죽었다. 출판으로 르네상스를 가져온 알도 마누치오는 1449년에 태어난다. 다빈치는 1452년에, 미켈란젤로는 1475년에, 라파엘로는 1483년에야 등장한다. ..
바다의 철학, 개발과 착취에서 경이와 생명으로 “끝없이 펼쳐진 것처럼 보이는 바다 앞에서 우리 인간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독일의 철학자 군터 슐츠가 『바다의 철학』(김희상 옮김, 이유출판, 2020)에서 묻는다. 바다는 인간을 때로는 매혹하고, 때로는 위협한다. 모험가의 가슴에 미지의 세계를 향한 무한한 상상을 부풀리고, 항해자의 눈앞에 운명의 단두대를 세워 잔혹한 좌절을 불러온다. 다리 달린 육상 동물인 인간은 바다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는 동시에, 몸을 단련해 헤엄치고 배를 만들어 항해함으로써 자유를 이룩한다. 헤겔을 빌려 말하자면, 주어진 자연을 넘어서 자신의 잠재된 가능성을 실현해 가는 것은 인류의 역사이고 정신의 운동이다. 바다를 생각하는 것은 곧 인간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다. 바다가 일으킨 생각의 역사, 즉 ‘바다의 철학’을 들여..
24시간 시대, 신자유주의적 시간 정치의 기원 1980년대 정치·사회·문화 ‘생활 시간’ 변화 관점서 탐색 경쟁 이기려 밤낮없이 일하고 박카스·우루사 먹으며 버텨 정부 ‘3S’ 앞세워 시민 통제 TV에 의해 진짜 휴식 빼앗겨 1980년대는 군사 반란과 내란으로 시작되었다. 시민들에게 ‘파쇼 타도’가 당연한 정치적 과제로 주어졌다. 하지만 이 시기에 경제적으로는 ‘개방’이라는 형태로 신자유주의가 도입되었고, 사회적으로는 패스트푸드가 일상화되고 외국 상표 의상이 일상화되는 소비문화가 발흥했으며, 문화적으로는 ‘3s(섹스・스크린・스포츠) 정책’으로 압축되는 대중문화가 꽃피기 시작한다.김학선의 『24시간 시대의 탄생』(창비, 2020)에 따르면, 1980년대에 ‘지금 여기’를 둘러싸고 두 가지 정치가 충돌했다. 신군부 정권은 박정희 시대의 ‘적폐 청산’과 ..
격정의 언어로 쓴 대한민국 철학사 유대칠의 『대한민국철학사』(이상북스, 2020)는 뜨거운 글이다. 일종의 격문 형태로 쓰여진 느낌이 든다. 이 책에서 저자는 승려의 철학인 고려의 철학, 양반의 철학이었던 조선의 철학에 이어서 대한민국의 철학을 정립하려는 뜻을 품는다. ‘너 자신을 알라’는 철학의 명령에 답하는 현재의 주체는 민중이다. 동학농민혁명과 3.1혁명의 주체로 “고난과 슬픔 속에서” 스스로를 반성하는 민중이다. 스스로를 철학 노동자로 칭하는 저자는 이 책으로써 민중들에게 먹일 ‘뜻’ 있는 철학을 생산하려 한다. 유대칠에 따르면, 한국 철학은 ‘나’를 ‘희망의 시작’으로 놓는 철학이다. “민중의 철학은 ‘나’로부터 시작해 스스로 ‘나’로 돌아오는” 주체의 철학이면서 이 “‘나’가 ‘홀로 있음’의 ‘나’가 아니라 ‘더불어 있음’의 ..
‘병자 클럽’의 독서 “우리는 혼자가 아님을 알기 위해 읽는다.”‘우리’는 외롭고 고립된 경험을 나누면서 조금 덜 아파지고, 질병이라는 보편의 우연성(‘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은 조금 덜 잔인해진다. 내 문제와 비슷한 동시에 각자 고유한 문제들과 씨름하는 다른 사람들을 보며 하루를 더 이어갈 힘을 얻는다. (중략) 아픈 사람의 질병 경험 쓰기가 자기 치유와 구제 노력이듯, 아픈 사람의 질병이야기 읽기도 자기 치유와 구제의 노력일 것이다.(중략) 이미 세상을 떠난 먼 나라의 작가들이 주요 구성원이었던 내 머릿속의 병자 클럽 안으로 지금 이곳의 아픈 사람들이 들어왔다. 우리는 저 경전들을, 병자 클럽의 권장 도서 또는 인기 도서를 책장에 채우고 복용한다. _메이, 「‘병자 클럽’의 독서」 중에서 ====이 글은 생애문화연구소 ..
현명한 사람이 돼 생명을 구하라 질병이 인간 삶의 진실 환기 “문학은 인간 곤경의 기록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가오싱 젠의 말이다. 붓다에 따르면, 인간이 겪는 근본 고통은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는 네 가지뿐이다. 이들은 신의 완전성(불멸)에 대비해 인간의 근원적 유한성(필멸)을 뼈아프게 환기한다. 질병은 인간의 몸과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감염병은 말할 것도 없다. 짧은 기간에 쏟아진 대량의 죽음 앞에서 인간은 흔히 이성을 상실한 채 패닉에 빠진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윤리적 아노미에 떨어지는 것이다. 이럴 때 인간이 야만으로 돌아서지 않도록 문학이 인류의 정신을 수호한다. 『데카메론』과 『페스트』에서 보듯, 큰 병이 때때로 큰 문학을 낳는 것은 이 때문이다. 최영화의 『감염된 독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