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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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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수집가들만 아는 책의 뒷담화 책 수집가에게 양심과 염치는 사치다. 물고기에게 잠수복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기도 하다.(48쪽) 이 바닥 선수들은 지인이 중고책 전문가랍시고 구하기 어려운 책을 구해 달라고 부탁하면 전혀 귀찮아하지 않는다. 몰랐던 희귀본을 알게 해 준 지인에게 감사하며(오직 마음속으로만), 이런저런 자신만의 경로로 그 책을 찾다가 2권 이상이 나오면 다행이지만, 1권밖에 없으면 그 지인에게 할 말은 딱 하나이다. “찾아봤지만 내 재주로는 못 찾겠는걸. 미안해.” 그러곤 다음날 배송되어 올 친구가 알려준 희귀본을 기다리면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다. 물론 양심의 가책 따위는 느끼지 않는다. (98~99쪽) 확 와 닿는 말이다. 박균호의 『그래봤자 책, 그래도 책』(소명출판, 2021)은 책 수집가들의 무..
2020년대 출판 트렌드 예측 김학원의 『편집자란 무엇인가』(휴머니스트, 2020)에서 예측한 향후 10년의 출판 트렌드. - 출판산업과 비즈니스의 모든 영역과 공정에서 온라인 비중이 더욱 늘어날 것이다. -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가 생산과 소비의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하면 책의 내용과 형식의 변화는 물론이고, 독서의 동기나 방식 등 e책의 소비 생태계에도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플랫폼, SNS 미디어, 유튜브 등 온라인 미디어나 채널과 결합한 저렴하고 얇은 레퍼런스 북 등 새로운 시도들이 선보일 것이다. - 현재는 5퍼센트에 불과한 전자책 시장이 출판산업 성장의 새로운 변수로 떠오를 것이다. - 종이책은 연간 발행 종수 10만 종 시대를 열고, 전자책은 연간 발행 종수 30만 종 시대를 열 것이다. 202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 전자책 ..
지구사의 지평에서 호모사피엔스 20만 년의 역사를 이야기하다 책을 읽고 있는데, 아내가 묻는다. “옥스퍼드 세계사? 영국(서구) 중심주의 서술 아니야?” 역사를 제 입맛대로 농단해 왔던 서양 제국주의에 대한 의심과 회의, 이것이 오늘날 세계사를 대하는 독자들의 일반적이고 정당한 태도이다. ‘도대체 세계사가 가능할까?’ ‘설령 그런 게 있더라도 인종주의(민족주의)에 오염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세계사는 가능하다. 세계가 하나로 연결됨에 따라, 또 인류의 역사가 생명의, 지구의, 우주의 역사라는 거대사의 지평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이 명확해짐에 따라, 세계사를 큰 흐름 위에서 기술하려는 시도들이 늘어 가고, 이에 대한 독자들 반응도 뜨겁다.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데이비드 크리스천의 『빅 히스토리』,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등에 대한 열광은 ..
의자, 침묵의 살인자 인간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질병에 시달린다. 타고난 질병도 일부 있으나, 대부분 삶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 젊을 때에는 사고나 중독이나 감염 탓에 병에 걸리고, 나이 들면 주로 노화로 인해 병든다. 그러나 당뇨병, 고혈압, 요통, 불안, 우울 같은 이상한 질병들도 있다. 우리의 구석기 조상들은 이러한 질병들을 몰랐다. 자연 상태에서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바이바 크레건리드는 『의자의 배신』(고현석 옮김, 아르테, 2020)에서 인간을 괴롭히는 이 이상한 질병들을 일으킨 범인이 ‘의자’라고 말한다. 인간의 기본형은 직립이다. 인간은 일어서서 두 발로 걸어서 손을 해방시킴으로써 지구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인간 발은 움직임의 가능성을 극대화하고, 특히 오랫동안 걷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 하루 대부분을 ..
젊은 여성은 아이를 낳고 할머니는 세상을 낳았다 폐경은 나이든 여성에게 보편적・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신체적 경험인 난자의 생산 중단이고, 월경의 소멸이며, “번식 수명의 종료”를 말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리처드 도킨스에 따르면, 모든 생명체는 “유전자를 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기계”이다. 동물 중에서 생식 능력을 상실한 암컷이 장기간 생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에 비해 인류는 특이하다. 월경의 중단으로 유전자를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후에도 인간 여성은 길게 삶을 이어간다. 생물학적 존재 이유를 박탈당한 ‘쓸모없는 시기’가 인간 여성에게만 유독 길게 지속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전자 기계의 고장이 임박한 죽음의 징조가 되는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 여성은 왜 긴 노년이라는 특이한 생애사를 갖도록 진화했을까. “폐경이라는 수수께끼를 푸는 것은..
사람들이 사라진다 우리 사회에 실종자와 가출인이 늘고 있다. 실종자는 아동, 지적 장애인, 치매 환자 중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은 이들을 말한다. 실종자 숫자는 2017년 3만 8789명에서 2019년 4만 2390명으로 지난 3년 동안 15.2% 증가했다. 성인 실종자를 뜻하는 가출인 숫자도 같은 기간 6만 5830명에서 7만 5432명으로 14.6% 늘었다. 작년 한 해 합쳐서 11만 7822명에 이른다. 이들 중 시간이 흘러도 발견되거나 돌아오지 않고 영영 사라지는 사람도 증가 중이다. 미발견 실종자는 2017년 18명, 2018년 25명, 2019년 186명으로 늘었고, 가출인 역시 671명, 809명, 1436명으로 증가세다. 시간이 흐르면 작년 숫자는 서서히 줄지 모르나 그 추세는 변하지 않을 듯하다. 사람들..
‘아빠 찬스’가 취업을 지배하는 시대에 “사람들은 대부분 출신 배경보다 근면 성실이 성공의 열쇠라고 믿는다.” 로런 리베라 노스웨스턴대 교수가 쓴 『그들만의 채용 리그』(지식의날개)의 첫머리다. 오늘날 현대사회는 시민들의 이 건강한 믿음을 배반한다. 이 책의 원제는 혈통(pedigree). 고학력 엘리트 학생들이 고임금 엘리트 직장을 독점하는 과정을 보여 주는 충격적인 책이다. 비결은 ‘아빠 찬스’다.부유한 고학력 부모는 자신들이 보유한 물질적 재화와 문화자본을 이용해 자녀들의 우월적 신분을 재생산한다. 자녀가 노동시장에 진입할 때 고소득 직장에 들어갈 수 있도록 아이의 일생을 처음부터 설계한다. 이 탓에 ‘대대로 엘리트’와 ‘우연한 엘리트’는 같은 대학을 나와도 들어가는 직장이 다르다.리베라 교수에 따르면, 첫 직장은 경제적 계층화가 발생하..
김종철 선생을 추모하며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이십 년이나 삼십 년쯤 후에 이 세상에 살아남아 있기를 바라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생태 비평지 《녹색평론》 창간사의 첫머리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생태운동가이자 문명의 철학자 김종철 선생의 글이다. 《녹색평론》은 1991년 11월에 첫 선을 보였다. 올해가 선생이 말했던 30년 후다. 다들 이 세상을 과연 어떻게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나날의 삶을 축복으로 느끼는가, 하루치 저주를 오늘도 힘겹게 견디는 중인가. 이 세상에서 계속 살아가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하루라도 빨리 다른 세상이 왔으면 하는가.물질적으로 풍요한 세상에서 어른들은 볼이 부풀도록 먹고 배를 두드리는지 모른다. 그러나 아이들은 하루하루 앞날이 불안한 세상을 사는 중이다. “당신들은 헛된 말로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