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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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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 학대에 대한 뒤늦은 기록을 읽다 지난 주말, 류이근 등이 쓴 『아동 학대에 관한 뒤늦은 기록』(시대의창, 2016)을 꺼내 다시 읽었다. 올해 서울도서관에서 같이 읽고 토론하기 좋은 책으로 선정한 책이기도 하다. 비통하고 참담하고 쓰라리고 미안한 글이다. ‘뒤늦은’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이 책엔 학대당했던 아이들의 생생한 실상이 담겨 있다.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어지고, 욕설과 협박에 시달리고, 추위와 더위에 고스란히 방임되고, 피부와 내장이 닿을 정도로 굶주리다 아이들은 죽는다. 책에 따르면, 2008~2014년까지 어른의 학대에 목숨 잃은 아이들은 모두 263명이다. 한두 주에 한 번꼴로, 매년 평균 37명이 극한의 고통 속에서 생명의 숨결을 놓는다. 64.7%는 신체 학대, 31.4%는 방임이다.일이 이미 벌어졌다는 점에서 ‘뒤..
재난 유토피아 1755년 11월 1일, 리스본 대지진이 일어났다. 리히터 규모 8.5~9.0. 엄청난 지진은 이 아름다운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건물의 85%가 파괴되고, 사망자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곧이어 찾아온 식량 부족과 감염병 때문에 굶어죽고 병들어 죽었다. 재난은 유럽인의 머릿속을 바꾸었다. 인간과 신의 관계에 확실한 균열이 생겨났다. 신정정치가 끝장나고 계몽주의가 일어섰다. 지진 발생 세 주 후, 볼테르는 「리스본 재앙에 관한 시」를 발표한다. “이 세상의 끔찍한 폐허를 응시하라./ 이 잔해들, 이 파편들, 이 불운한 잿더미들을.”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자, 프랑스대혁명까지 100년이면 충분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에서 2005년 뉴올리언스 대홍수까지 미국을 덮친 다섯 차례 재..
인간은 ‘상대방의 거짓말’을 가려내는 데 무능하다 “낯선 사람이 우리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는데, 왜 우리는 그걸 알아채지 못할까?”『타인의 해석』에서 베스트셀러 저자 말콤 글래드웰이 묻는다. 관련한 연구를 집약하고 풍부한 사례를 집적해 인간 마음의 심오한 비밀을 캐내는 날카로운 통찰력, 한 편의 추리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는 탁월한 글 솜씨는 여전하다.인류사 대부분 동안 인간은 서로 잘 아는 이웃과 함께 살았다. 상대가 누구이며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는지 모르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진화했기에 우리 마음은 몸짓이나 어조 같은 사소한 신호만으로도 친한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데에는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 이에 반해 낯선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을 이해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기에 우리 마음은 이들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아주 서투르다. 현대..
한국사회의 ‘감정 사전’을 비판적으로 다시 쓰다 김신식의 『다소 곤란한 감정』(프시케의숲, 2020)을 읽다. 이 에세이는 ‘심정’을 다루고 있다. 김경자・한규석의 논의를 빌려서 저자는 심정을 “상대방이 이해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지닌 활성화된 속마음”으로 정의한다. 한마디로, 심정이란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상대방 마음에 신경 쓰도록 하는 감정의 특정한 작용이다.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 마음에 더 신경을 쓸까? 사회 내 위계가 사람의 감정을 불공평하게 표출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군가의 감정을 읽는다는 것은 한 사회가 감정을 처리하는 특정한 규칙을 다루는 일이고, 동시에 감정을 권력의 작동을 들여다보는 렌즈로 사용함으로써 한 사회 내부에 층층이 쌓여 있는 위계를 읽어내는 일이다. 이 책이 “한국사회의 감정 문화에 대한 비평”이면서 한국사..
한국 문학은 젊은 비평가를 어떻게 관리해 왔는가 ‘지식인-비평(가)’의 시대가 국가, 민족, 공동체, 집단 주체라는 단위를 통해 문학을 재단함으로써 작품의 개별성과 복수성을 박탈해 왔고, 이를 기존 비평의 무능으로 평가하는 입장이 등장합니다. (중략)그리하여 각 작품의 분석적이고 세밀한 읽기를 통해 ‘공동체’의 윤리보다 ‘개별자’의 도덕을 강조하는 2000년대 전후의 ‘작가-비평가’가 출현합니다. (중략)젊은 평론가들을 고정 멤버로 하여 신간들에 대한 서평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발행하는 팀이 [주요 출판사에] 있었습니다. 즉 2009년을 전후로 일종의 ‘주니어 평론가 시스템’이 형성되었으며 이 시스템 안에서 활동했던 평론가들은 ‘젊은 평론가’라는 호명 하에 여러 특집 기획에서 함께 묶여 필자로 초대되는 일이 잦았고 이러한 기획들이 여러 번 반복되면서 2..
걷기에서 희망을 읽다 집 앞, 당현천 산책길에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지루한 방바닥 구르기와 답답한 마스크 생활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몰려나와 물 따라 난 길을 천천히 걷는다. 따스한 봄볕이 마음을 부추기고, 상쾌한 바람이 생기를 가져오며, 살짝 벌어진 꽃들이 기쁨을 일으킨다. 우연히 마주친 이웃과 가볍게 안부를 나누고 반가운 대화를 즐기기도 한다. 우정과 사랑이 곳곳에서 피어난다.프랑스 철학자 로제 폴 드루아의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백선희 옮김, 책세상, 2017)에 따르면, “모든 이동이 기계화・동력화된” 현대 사회에서 걷기는 “산으로, 숲으로, 들판으로, 바닷가로” 떠나야만 할 수 있는 “특별한 활동”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걷기’는 “인간의 기본적 몸짓, 세상에 존재하는 본래적 방식”이다. “오래 걸을수록 ..
신도시에는 거리의 생활이 없다 어릴 때 살던 서울 약수동 달동네는 골목 천국이었다.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집들이 복잡하게 맞물리면서 좁고 넓은 길들을 거미줄처럼 뽑아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지나지 못할 골목에서 양보의 미덕을 익혔고, 동네 아이들 비밀 장소인 세 평 공터에서 놀면서 우정을 쌓았으며, 과일, 채소, 생선, 철물, 등유, 곡물, 잡화, 약국 등 구석구석 가게들을 구경도 하고 심부름도 다니면서 셈을 배웠다.약수동 떠나 서른 해 가까이 살아온 동네가 서울 노원이다. 갈대 무성한 드넓은 벌판을 바둑판처럼 정리해 비슷한 건물들을 줄지은 신도시다. 등산할 수 있는 산과 산책할 수 있는 강이 있고, 집 근처 한두 블록 안에 꼭 공원이 있다. 백화점과 쇼핑센터, 종합병원과 대학, 미술관과 과학관, 학원가와 상점가 등도 마련되어 있다...
빈자의 미학, 한 건축가의 생을 건 약속 “빈자의 미학, 여기에선 가짐보다는 쓰임이 중요하고 더함보다는 나눔이 중요하며 채움보다는 비움이 중요하다.” 승효상의 『빈자의 미학』(느린걸음, 2016)을 틈 내어 읽었다. 1996년 미건사에서 나왔다 품절된 것을 몇 해 전 느린걸음에서 다시 펴냈다. 절판되었을 때에는 헌책방에서 10만 원 넘는 고가에 판매되기도 한 책이다. 이 책은 영국의 한 건축학교 초청 강의록으로 쓰인 것이지만, 40대의 젊은 건축가였던 승효상이 자신의 미래를 걸고 쓴 건축 미학적 선언이기도 하다. 책을 열면 위에 인용한 유명한 제사가 나오고 이어서 충남 당진 돌마루 공소의 사진이 있다. 별다른 장식 없이 줄 지은 의자만으로 꾸려진 예배당 천정에서 한 줄기 강한 빛이 쏟아진다. 어둠과 빛만으로 꾸려진 소박한 공간에서 흑백의 강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