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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공감과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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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새벽 숲길을 거닐며 평명(平明).어둠 속, 흙으로 맨발을 푸는 순간, 이 말이 떠올랐다. 새벽을 나타내는 말이다. 평(平)은 평평하고, 평화롭고, 평온하고, 평등하다. 명(明)은 밝고, 맑고, 환하고, 깨끗하다. 어떻게 조합해도 아름답다. 온 세상이 골고루 빛으로 차오르는 때, 소나무 청량한 향기가 사방으로 가득하다. 콩잎이 바람에 스륵스륵 소리를 낸다. 이슬을 흠뻑 덮어쓰고도 귀뚜라미는 씩씩하고 우렁차게 노래한다.“뭐가 쓸쓸해? 뭐가 쓸쓸해? 뭐가?! 뭐가?! 뭐가?!”(황인숙, 「가을밤 2」) 아아, 정말 쓸쓸하구나. 처음 물음표 둘은 즐거운 반문이지만, 뒤쪽 물음느낌표 셋은 어쩌면 쓰디쓴 울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름은 아직 물러서지 않았고 가을은 미처 이르지 않았으니, 바람이 불어도 쓸쓸하지 않고 소름이 돋아도 여..
‘햄릿’ 읽는 농부들 _ 농촌인문학하우스 이야기 매주 홍동밝맑도서관에서 인문학 공부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매주 시 한 편씩을 읽고, 『햄릿』을 읽고 있습니다. 지난주 《문화일보》 유민환 기자가 다녀갔는데, 기사가 실렸네요. 남은 삶은 이렇게 공부만 하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블로그에 옮겨 둡니다. ‘햄릿’ 읽는 농부들 “농촌살이 힘 키우죠”충남 홍성군 홍동면 ‘농촌 인문학 하우스’ 개설 4개월 스물 청년부터 중년까지 20여 명생화학·일본어·한자공부 함께“학습 통해 문제도 스스로 해결” 첫 유기농 농사 생태마을로 유명마을 찾는 방문객 年 2만 명 달해FTA 등 세계화속 자립방안 찾아 “우리의 의도와 운명은 정반대로 달리기에/우리가 계획한 것은 끊임없이 뒤집히오./우리 생각은 우리 것이지만, 그 결과는 우리 것이 아니라오.” (‘배우 왕’역을 맡은 학생)..
[문화산책] 연필을 들고 떠나는 여행 괴테의 생애는 셋으로 나누어진다. 바이마르-이탈리아-바이마르. 연암 박지원의 생애도 마찬가지다. 한양-연경-한양. 한 해 반에 걸친 이탈리아 기행은 괴테에게 “마치 익은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필연성, 즉 운명의 형식으로 제시됐다. 여섯 달에 걸친 연행(燕行)은 박지원에게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충격의 연속으로 다가왔다. 사실 모든 작가는 여행을 통해 극적으로 변신한다. 바이마르 궁정에서 질식해 가던 괴테는 이탈리아 기행을 떠났다 돌아오면서 상상력에 물기가 오르고 사유에 품격이 얹히는 극적 전환을 맞이했다. 할 일 없이 세월을 죽이던 중년의 한량 박지원은 그 당시 세계의 수도인 북경의 문물을 접한 후 바닥이 하늘로 하늘이 바닥으로 뒤집히는 생각의 격변 속에서 대문장가로 거듭났다.여행은 왜 떠..
[문화산책] 어머니 국수, 아버지 냉면 “음식은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 준다”살아감을 생각하게 하는 평양국수 집에서 필자는 이북식 냉면을 먹어본 적이 없다. 여름이 되면, 어머니는 식초를 몇 방울 떨어뜨려 오이냉국을 마련한 후 얼음을 둥둥 띄우고 가는 국수를 몇 덩이 말아 주셨을 뿐이다. 또는 가는 국수에 잘 익은 열무를 올린 후 달걀을 얹고 얼음을 두르고 고추장을 조금 넣어 살살 비벼 주셨을 뿐이다.매끄러운 국숫발이 한껏 오므린 입술을 조르륵 통과하면서 이에 부딪히면 붉은 혀가 저절로 밀려 나오면서 국수를 휘감아 잽싸게 입 안으로 말아 들인다. 혀끝을 건드리는 매콤한 맛에 뒤이어 국수가 요동치면서 입천장을 두드리고, 국수에 실린 얼음의 찬 기운을 가득 퍼뜨려 머릿속 끝까지 오싹해진다. 이 덕분인지 우리 형제는 지금도 앉은자리에서 큰 사발로 두..
맹자의 농사법 _ 홍동 마을에서 보낸 편지 창으로 들어오는 새벽 첫 빛에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쉰 살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면서 늦은 잠이 줄고, 새벽에 깨는 일이 조금씩 늘어갑니다. 세월을 미리 대비하는 것은 마음이 아니라 몸이 먼저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은 언제나 몸 가는 곳을 뒤늦게 좇는 것만 같습니다.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드문드문 들립니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호미 한 자루만 들고 집 뒤쪽 텃밭에 나갑니다. 뒷산 부엽을 긁어서 덮고 왕겨를 덧입혔지만, 자라는 풀들을 어쩔 수는 없습니다. 이랑 사이로 비죽비죽 솟아오르는 풀들을 하나하나 솎습니다. 평일에는 각자 삶을 살고, 주말에만 밭을 손대다 보니 그사이 무성하기 일쑤입니다.지난 가을부터 홍동에서 몸을 쉬면서 ‘사람이 풀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는데, 풀들은 과연 힘..
완두를 따면서 첫 수확의 때가 왔다. 어제 오후 완두를 소복이 따서 담았다. 집으로 가져가서 밥에 놓아먹거나 쪄서 까먹을 생각이다. 입에 저절로 군침이 돈다. 초여름 가뭄이 계속되면서 밭작물이 실하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걱정했는데, 실하게 무척 많이 열려서 다행이다. 앞으로도 몇 번은 더 수확해서 온 가족이 나눌 생각을 하니 마음이 저절로 즐겁다.새벽에 일어나 밭으로 나가 생채, 상추, 적상추 등(아직 이름을 제대로 구분 못 한다.ㅠㅠ)을 따서 챙겼다. 저녁에는 고기 두어 근 사서 온 가족이 둘러앉아 쌈을 먹을 생각이다. 지난주에 한아름 가져갔는데도 한 봉지 가득 담을 정도로 다시 자랐다. 새삼 땅의 힘을 느낀다. 심고 조금만 가꾸면 발버둥치면서 살려고 애쓰지 않아도 밥상의 풍요를 만들어 낸다.한 번뿐인 이 삶의 ..
공자의 인생 자술(自述) [세계일보 칼럼] 공자의 인생 자술(自述)은 아주 짧다. 고작 서른여덟 자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공자는 아주 장수했다. 가장 아끼던 제자인 안회(顔回)와, 과정(過庭)의 가르침을 베푼 아들 공리(孔鯉)가 먼저 죽어버리는 참척의 슬픔을 견뎌야 할 정도였다. 햇수로는 70년이 넘고, 날수로 따지면 2만 6000여 일에 이른다.전란이 끝없이 이어진 춘추 시대, 비교적 낮은 신분인 사(士)로 태어났으나 세상을 구제하려는 큰 뜻을 품고 천하를 편력한 삶이었다. 정말로 파란만장했다. 애제자로부터 “선비가 굶주리는 일도 있답니까?”라는 항의를 받기도 했고, 세상에 초연한 채 숨어 사는 은자로부터 “상갓집 개”라고 비웃음당하기도 했다. 사연을 모조리 글로 옮기면 수십 수레는 족히 되었을 것이다.하지만 공자는 인생의 자잘한 굴곡을 전..
봄날, 새로운 도서관을 맞이하며(세계일보 칼럼) 봄날, 새로운 도서관을 맞이하며 농부들의 희망 토종 ‘씨앗도서관’전국으로 퍼져 우리 씨앗 지키길 들빛은 아직 눈으로 덮여 희기만 한데, 마음은 봄으로 푸르게 부풀어 오른다. 하지만 꽃을 시샘하는 바람이 코끝을 스칠 때마다 목이 절로 옷깃 속으로 들어간다. 겨우내 한가롭던 시골 마을이 서서히 기지개를 켠다. 올해 봄부터는 텃밭을 일구려 하기에 생각이 분주하다. 피부에 와 닿는 공기 한 줄기 한 줄기, 매일 조금씩 풀려 가는 땅의 움직임에 생기가 느껴져 예사롭지만은 않다. 지난 늦가을에 심은 마늘과 양파의 땅속 소식도 궁금하다. 특히 마늘은 마을 할머니 한 분이 오랫동안 애지중지 대물림한 토종 씨마늘이어서, 부엽을 덮지 않은 내 게으름 탓으로 매서운 추위에 혹여 상하지나 않았을지 애를 졸인다. 만약에 이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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