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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공감과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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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어머니 국수, 아버지 냉면 “음식은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 준다”살아감을 생각하게 하는 평양국수 집에서 필자는 이북식 냉면을 먹어본 적이 없다. 여름이 되면, 어머니는 식초를 몇 방울 떨어뜨려 오이냉국을 마련한 후 얼음을 둥둥 띄우고 가는 국수를 몇 덩이 말아 주셨을 뿐이다. 또는 가는 국수에 잘 익은 열무를 올린 후 달걀을 얹고 얼음을 두르고 고추장을 조금 넣어 살살 비벼 주셨을 뿐이다.매끄러운 국숫발이 한껏 오므린 입술을 조르륵 통과하면서 이에 부딪히면 붉은 혀가 저절로 밀려 나오면서 국수를 휘감아 잽싸게 입 안으로 말아 들인다. 혀끝을 건드리는 매콤한 맛에 뒤이어 국수가 요동치면서 입천장을 두드리고, 국수에 실린 얼음의 찬 기운을 가득 퍼뜨려 머릿속 끝까지 오싹해진다. 이 덕분인지 우리 형제는 지금도 앉은자리에서 큰 사발로 두..
맹자의 농사법 _ 홍동 마을에서 보낸 편지 창으로 들어오는 새벽 첫 빛에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쉰 살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면서 늦은 잠이 줄고, 새벽에 깨는 일이 조금씩 늘어갑니다. 세월을 미리 대비하는 것은 마음이 아니라 몸이 먼저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은 언제나 몸 가는 곳을 뒤늦게 좇는 것만 같습니다.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드문드문 들립니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호미 한 자루만 들고 집 뒤쪽 텃밭에 나갑니다. 뒷산 부엽을 긁어서 덮고 왕겨를 덧입혔지만, 자라는 풀들을 어쩔 수는 없습니다. 이랑 사이로 비죽비죽 솟아오르는 풀들을 하나하나 솎습니다. 평일에는 각자 삶을 살고, 주말에만 밭을 손대다 보니 그사이 무성하기 일쑤입니다.지난 가을부터 홍동에서 몸을 쉬면서 ‘사람이 풀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는데, 풀들은 과연 힘..
완두를 따면서 첫 수확의 때가 왔다. 어제 오후 완두를 소복이 따서 담았다. 집으로 가져가서 밥에 놓아먹거나 쪄서 까먹을 생각이다. 입에 저절로 군침이 돈다. 초여름 가뭄이 계속되면서 밭작물이 실하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걱정했는데, 실하게 무척 많이 열려서 다행이다. 앞으로도 몇 번은 더 수확해서 온 가족이 나눌 생각을 하니 마음이 저절로 즐겁다.새벽에 일어나 밭으로 나가 생채, 상추, 적상추 등(아직 이름을 제대로 구분 못 한다.ㅠㅠ)을 따서 챙겼다. 저녁에는 고기 두어 근 사서 온 가족이 둘러앉아 쌈을 먹을 생각이다. 지난주에 한아름 가져갔는데도 한 봉지 가득 담을 정도로 다시 자랐다. 새삼 땅의 힘을 느낀다. 심고 조금만 가꾸면 발버둥치면서 살려고 애쓰지 않아도 밥상의 풍요를 만들어 낸다.한 번뿐인 이 삶의 ..
공자의 인생 자술(自述) [세계일보 칼럼] 공자의 인생 자술(自述)은 아주 짧다. 고작 서른여덟 자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공자는 아주 장수했다. 가장 아끼던 제자인 안회(顔回)와, 과정(過庭)의 가르침을 베푼 아들 공리(孔鯉)가 먼저 죽어버리는 참척의 슬픔을 견뎌야 할 정도였다. 햇수로는 70년이 넘고, 날수로 따지면 2만 6000여 일에 이른다.전란이 끝없이 이어진 춘추 시대, 비교적 낮은 신분인 사(士)로 태어났으나 세상을 구제하려는 큰 뜻을 품고 천하를 편력한 삶이었다. 정말로 파란만장했다. 애제자로부터 “선비가 굶주리는 일도 있답니까?”라는 항의를 받기도 했고, 세상에 초연한 채 숨어 사는 은자로부터 “상갓집 개”라고 비웃음당하기도 했다. 사연을 모조리 글로 옮기면 수십 수레는 족히 되었을 것이다.하지만 공자는 인생의 자잘한 굴곡을 전..
봄날, 새로운 도서관을 맞이하며(세계일보 칼럼) 봄날, 새로운 도서관을 맞이하며 농부들의 희망 토종 ‘씨앗도서관’전국으로 퍼져 우리 씨앗 지키길 들빛은 아직 눈으로 덮여 희기만 한데, 마음은 봄으로 푸르게 부풀어 오른다. 하지만 꽃을 시샘하는 바람이 코끝을 스칠 때마다 목이 절로 옷깃 속으로 들어간다. 겨우내 한가롭던 시골 마을이 서서히 기지개를 켠다. 올해 봄부터는 텃밭을 일구려 하기에 생각이 분주하다. 피부에 와 닿는 공기 한 줄기 한 줄기, 매일 조금씩 풀려 가는 땅의 움직임에 생기가 느껴져 예사롭지만은 않다. 지난 늦가을에 심은 마늘과 양파의 땅속 소식도 궁금하다. 특히 마늘은 마을 할머니 한 분이 오랫동안 애지중지 대물림한 토종 씨마늘이어서, 부엽을 덮지 않은 내 게으름 탓으로 매서운 추위에 혹여 상하지나 않았을지 애를 졸인다. 만약에 이 마..
거대한 여백 - 디자인에 대한 몽상(《디자인》 2012년 7월호) 이 글은 작년 7월에 월간 《디자인》에 실었던 글이다. 게재 직후에 원고 파일을 실수로 삭제하는 바람에 사라졌는데, 북디자인과 관련해서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문득 발견했다. 과거에 쓴 글이 어느 날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는 기분이다. 여기에 옮겨 둔다. 거대한 여백 디자인에 대해서 쓰려 하니 가장 먼저 거대한 여백이 떠오른다. 순전한 흰색, 어떤 문자도 문양도 그 위에 그려질 수 없는 절대 공간. 한창 산을 좋아했을 때, 새벽에 텐트 문을 열고 나오면 첫 빛으로 자태를 드러내면서 망막을 하얗게 태우고 언어의 길을 단숨에 끊어버렸던 눈 내린 직후의 흰색 산야. 어느 한밤중 문득 자다 일어나 꿈속에서 썼던 아름다운 시를 끼적여보려고 대학 노트를 여는 순간, 형광등 아래에서 날카롭게 빛을 뿜어내 머릿속의 리셋 ..
지금, 출판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기획회의》 기고) 《기획회의》 356호에 여는 글을 썼다. 이번 호 특집은 2013년 출판계 키워드 50으로 올해를 돌이켜보고 내년을 전망하자는 것이다. 해마다 11월 마지막 호는 이 특집으로 꾸려진다. 여는 글 역시 이에 걸맞았으면 했는데, 쓰다 보니 그러지 못하고 조금 우울한 어조가 나와 버렸다. 아마 글을 쓸 때 감기로 몸이 아팠던 탓일 터이다. 어쨌든 아래에 옮겨서 기록해 둔다. 어려운 시절(Hard Times)!산업 자본주의가 확산되던 시절, 고난에 빠진 영국 노동계급의 처참한 삶을 보여주려고 찰스 디킨스는 자기 소설의 제목을 이렇게 달았다. 오늘날 한국출판이 겪고 있는 현실에 대해 누군가 같은 이름표를 붙이더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말과 글’의 비즈니스답게 해마다 출판은 수많은 화제들을 쏟아내는데, ..
여름에 읽기 좋은 우리 문학 예스24에서 여름마다 내는 전자 잡지 《문학의 숲을 거닐다》의 기획 코너 ‘여름에 읽기 좋은 우리 소설’에 짤막한 글을 하나 썼다. 아래에 옮겨 둔다. 문학과 관련해서 세상에 떠도는 말들 중 듣기 괴로운 말이 있는데, 이른바 ‘문단 4대 천왕’과 같은 말이다. 어디에서 연유한 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공지영, 김훈, 신경숙, 황석영 등 소설책을 내기만 하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작가들을 가리키는 말인 듯한데, 이건 무슨 무협 세계도 아니고, 말초적 호기심을 달구어서 세속적 관심이나마 끌어 보려는 속셈이 어쩐지 아프고 불편하다.문학이란 제자리에서 각자의 모양으로 피어나는 야생초와 같다. 네 가지 풀 말고도 어떤 풀이든 상관없이, 이 뜨거워지는 지구에서 삶의 온실 가스를 빨아들여 청량한 산소로 바꾸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