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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문득문득 편집이야기

우리나라에서 서평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이전의 글에서도 밝혔지만, 서평이란 대량으로 책이 출판되어 보급되고, 이에 따라 동시에 함께 책을 읽는 독자들이 없으면,  하나의 문화로 존재하기 힘들다. 아울러 서평을 관심 있는 독자들이 거의 동시에 읽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신문이나 잡지 같은 매체가 있어야 문화적 의미를 얻는다. 우리나라에서 현대적 의미의 서평을 이야기할 때도 이런 점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신문의 역사는 1883년 10월 1일 《한성순보》가 발행되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 신문에는 서평이나 신간 안내가 실리지 않은 듯하다.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에서 이런저런 검색어를 넣어가면서 필자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한성신문》 1884년 6월 13일자에 중국에서 발행된 서양 선교사들 회보인 《중서견문록(中西見聞錄)》에 실린 「아리스토텔레스 전(傳)」의 내용을 옮겨 전하는 기사가 실렸는데, 이걸 신간 소개나 서평으로 보긴 아무래도 어려울 듯하다.(필자가 사용한 검색어는 신간(新刊), 신서(新書), 서적(書籍), 서책(書冊), 서평(書評) 등이다. 엄밀함을 확보하려면, 일일이 눈으로 읽으면서 확인해야 하나, 시간 관계상 이는 불가능했다. 전문 연구자들의 후속 연구가 절실하다.)  

그 뒤를 이은 《한성주보》 1887년 8월 1일자엔 일본인이 쓴 『중국선수후성론(中國先睡後醒論)』의 내용을 소개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 역시 본격 서평이라기보다는 자기 주장을 서평 형식에 더하는 논설이라고 할 수 있다. 

신간 안내 광고가 아니라, 기자가 쓴 신간 기사가 처음 실린 것은 아마도 《황성신문》 1903년 4월 22일자 「여도 신간(輿圖 新刊)」인 듯하다. “프랑스어 학교에 다니는 이연응 씨가 지난겨울 방학 여가에 『대한여지도(大韓輿地圖)』를 출간하면서, 그 곁에 주해도 달았으나, 아직 널리 알리지 못하여 사준 사람이 없어서 그 손해가 적지 않다더라.” 서평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이 정도면 우리나라 사람이 써서 출판한 신간을 소개하는 단신 기사로는 그 내용이나 형식에서 충분한 듯하다. 

《황성신문》 1907년 4월 19일 자엔 『무원록(無冤錄)』 출간 소식이 실렸다. “광학서포(廣學書舖) 주인 김상만 씨가 『무원록』을 국한문으로 증수하고 풀어서 간행하여 편하게 읽을 수 있으므로, 살해 사건의 검안(檢案)에 긴요한 책이 될 터이니, 군수와 법률에 뜻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갖추어야 할 책이더라.” 이 기사는 간단한 책 소개와 추천을 겸하고 있어, 오늘날 신문의 신간 안내 기사에 한층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현대적 의미의 서평에 가까운 글은 《황성신문》에 1900년 8월 13일 자에 실린 「논설 : 가생의 소를 읽고 느낀 바가 있어(論說:讀賈生疏有感)」를 들 수 있다. 이 글은 한나라 때 가의(賈誼)의 상소를 읽다가 느낀 점을 전하는 글이다. “늙은 오동나무에 가을비 내릴 때, 『한서(漢書)』를 읽다가 가의의 상소에서 ‘통곡할 만한 것이 하나요, 눈물을 흘릴 만한 것이 둘이요, 탄식할 만한 것이 여섯입니다’ 하는 구절에 이르러, 나도 모르게 책을 덮고 탄식했노라”라는 글로 시작해 나라 형편에 대한 근심과 걱정을 늘어놓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체로 외국 서적이나 사료(史料)를 소개하면서 간단한 느낌을 덧붙인 이런 형식의 글들은 이후에도 꾸준히 이어진다.

《황성신문》 1901년 6월 29일 자엔 「호질을 읽고 탄성을 내뱉다(讀虎叱一嘆)」라는 글이 논설 형태로 실렸다. 이는 『연암집』에 들어 있는 박지원의 「호질(虎叱)」을 읽고 그 느낌을 적은 글이다. 『연암집』은 1900년 김택영이 6권 2책으로 처음 간행했고, 1901년에 빠진 작품들을 모아 『속연암집』(3권 1책)으로 펴냈다. 이 글이 신문에 실렸을 때는 따끈한 신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작품이야 이전에도 꽤 읽혔겠으나, 출판된 책을 읽고 쓴 평으로 기꺼이 주목할 만하다. 

필자는 「호질」이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는 것보다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것이 더 많다’는 내용”을 담은 “천고의 아름다운 문장”으로 평가한 후, ‘인심이 호랑이보다 사납다는 걸 알겠다’라는 감상을 덧붙인다. 현대적 의미의 서평 형식에 꽤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겠다. 

반재유의 연구에 따르면, 1905년을 기점으로 논설(論說)이란 이름을 달고 책에 빗대어 현실을 논하는 독후감 목록이 점차 동양 고전에서 서양 전기류로 옮아간다. 이는 을사늑약 이후 나라가 기울어가면서, 애국 계몽 운동이 시급해졌기 때문이다.

이에 1906년부터는 외서에 대한 서평 형태로 자세한 책 내용과 함께 필자 주장을 함께 담아내는 글이 연재 형태로 실리기 시작한다. 「논설 : 월남망국사를 읽다(論說:讀越南亡國史)」가 1906년 8월 28일부터 9월 5일까지 총 7회에 걸쳐 실렸고, 「논설 : 이태리건국삼걸전을 읽다(論說:讀意大利建國三傑傳)」가 같은 해 12월 18일부터 28일까지 총 10회에 걸쳐 실렸다.

이 글들은 “‘독(讀)’이라는 어휘와 함께 특정 서적의 이름을 병기”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어 서평으로서도 주목을 요할 뿐 아니라 “근대 논변류 양식”, “초기 역사 전기류의 번역·번안 형태”로서도 눈길을 끈다. 이 시기에 《대한매일신보》의 논설란에서도 「논설 : 강남해애국론을 읽다(論說:讀康南海愛國論)」(1906년 3월 20일) 등이 발표됐다. 동시에 황성신문사, 탑인사, 광문사, 박문사 등 민간 출판사의 서적 간행이 활발해지고, 서적 광고도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근대 신문 서평 또는 서평 문화는 《황성신문》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10년 일제 강점 이후에도 신문과 잡지에서 책 소개와 서평은 꾸준히 이어진다. 《매일신보》(1910)가 그 중심이었다. 앞에서 말했듯, 대중 독자의 존재는 근대의 발명품이다. 신문이나 잡지 등 인쇄 자본주의 미디어를 통해 모두가 동시에 같은 책을 읽고, 같은 취향을 기르며, 같은 생각을 나누는 경험 없이 대중 독자는 탄생할 수 없다. 대량으로 거의 동시에 한 국가 또는 지역 전체에 정보를 값싸게 공급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이 있어야 근대인이 존재할 수 있다. 『만들어진 공동체』에서 베네딕트 앤더슨이 이야기했듯이, 근대 국가의 국민은 신문과 잡지가 만들어 낸 상상의 공동체다. 따라서 좋은 책을 골라서 이를 함께 읽자고 권하는 행위는 인쇄 자본주의의 내재적 작동 과정에서 필연적이다.

자본의 이런 작동이 만들어 낸 것이 베스트셀러이다. 책이라는 물건을 대량으로, 동시에 공급할 수 있는 시장 시스템이 존재하고, 이를 단기간에 아주 많이 소비하도록 유혹하는 언어들(가령, 서평 같은)이 존재해야 베스트셀러는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 천정환에 따르면, “모든 베스트셀러는 독자의 대중 심리에 기초한 신경증적인 정서 상품”으로, 근본적으로 “타인의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여 선택함으로써 만들어지는” 상품이다.

1910년대에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던 이광수의 『무정』이 엄청난 베스트셀러였다는 건 책을 가운데 놓고 유행을 일으키는 “근대적 저널리즘의 개입”이 사회 곳곳에 스며들었다는 간접적 증거이다. 아울러 이해조 등의 신소설도 《매일신보》 연재와 소개로 큰 인기를 끌었다.

현대적 의미의 출판-언론-독서 공생체가 마련된 것은 1920년대부터다. 《동아일보》(1920), 《조선일보》(1920), 《시사신보》(1921) 등의 신문, 《개벽》(1920), 《신민》(1921), 《조선지광》(1921), 《신여성》(1923), 《조선문단》(1924), 《별건곤》(1926) 등의 잡지에 책이 소개되고, 문학 작품을 중심으로 서평과 비평이 게재됐다.

특히,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독서면을 할애해 도서관 통계나 서점의 판매 순위 등을 정기적으로 보도・분석”하고, “이를 통해 당대 어느 계층이 어떤 책들을 주로 읽는지 파악할 수 있게 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독서 기술 소개, 독서 지도 방법 안내 등을 통해서 독서 운동을 일으킴으로써 출판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1923년 6월 《동아일보》는 ‘일요호’를 신설하여 각 분야의 논단 성격의 글과 세계 문화 유적 등을 소개하고, 독자 투고를 받아서 시, 동화, 감상문 등을 실었다. 이 지면은 ‘월요란’을 거쳐 1924년 12월 ‘문예란’으로 이어진다. 이는 부인란, 아동란과 함께 《동아일보》 학예면의 세 기둥을 이룬다. 문예란엔 전문가의 비평과 함께 독자 투고 형태로 감상문 등이 실렸고, ‘문단편신(文壇片信)’이라는 코너를 두어서 문학 신간 소식을 꾸준히 전했다. 이는 오늘날 신문 ‘문학면’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1931년부터 게재되었던 《동아일보》의 ‘독서주간(讀書週間)’은 우리나라 북리뷰 지면의 선구라고 할 수 있다. 이 지면은 기존에 운영하던 학예면의 일요판에 ‘독서주간’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발행했다.  

지면은 “서적의 직접적 소개란인 내외신간평(內外新刊評), 세계명저소개(世界名著紹介), 조선고전해제(朝鮮古典解題), 대독(代讀), ‘에쓰’어 서적 소개(‘에쓰’語書籍紹介)와 독자 참여로 이루어진 독서질의(讀書質疑), 독서소식(讀書消息), 서재풍경(書齋風景) 이외에 독서격언(讀書格言), 서고엽기(書庫獵奇), 독서여록(讀書餘錄), 독서풍경(讀書風景), 세계도서관순례(世界圖書館巡禮)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내외신간평’엔 전문 문인과 일반 독서자의 서평을 싣고, ‘대독(代讀)’엔 서적의 요약본을 실었으며, ‘에스어 신간 소개’에는 당대 유행이었던 에스페란토어 서적을 소개했다. 한편, ‘독서 소식’엔 주로 독서회 소식을 알렸다. 전체적 구성은 현재 신문의 북리뷰 지면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한 해 동안 운영되던 ‘독서주간’이 폐지된 후, 신문 문화면은 서평보다는 문학 기사를 중심으로 “문화와 예술에 대한 비평 기사와 생활정보” 등으로 구성된 채, 오랫동안 발행되었다. 

“1950년대에는 문학 위주의 비평의 시대가 열림과 동시에 순수예술 중심이었다가, 그 후 지면이 늘어나면서 내용도 국내외 문학, 음악, 미술, 연극, 영화, 예술·저작 활동, 학술, 문화재, 교육, 종교, 출판, 여성, 가정, 과학, 의학, 건강, 여행, 레저 등 그 범위가 크게 늘고 다양해졌다.” 

문학 작품에 대한 평론은 이후에도 신문에 꾸준히 연재되었으나, 책을 다루는 본격적 서평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식민지 시대까지는 특별히 눈에 띠는 사례가 존재하지 않는 듯하고, 광복 이후 한국전쟁을 지날 때까지 신문이나 잡지에서 서평이 실린 경우는 극히 드문 것 같다.(물론, 섣불리 결론을 내리기에는 아직 실증적 연구가 부족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후의 이야기는 다음 번 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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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기획회의>에 청탁을 받아서 이런저런 연구를 뒤적여서 정리한 글이다. 

시간이 2주밖에 안 되어서 자료를 충분히 보지 못한 한계가 있다. 

일제 강점기에 나온 수많은 잡지에 서평이 실렸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

역시 길이 관계상 이 글의 일부만 지면에 실리게 되었다. 

1931년 동아일보 일요판 학예면 독서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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