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소설에선 큰따옴표 없이 대화를 주고받는 식으로 쓰는 걸 흔히 본다.
강아지?
사례금 오십만 원.
뭐라고?
거기 그렇게 적혀 있었어. 전단에.
이런 식이다.
이런 문장에서 큰따옴표가 있는 것하고, 없는 것의 차이는 뭘까. 작가와 편집자의 자의식이 어느 정도 담겨 있을까 궁금하다.
물론, 작가는 감각적으로 이런 일을 하곤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편집자 쪽은 어떤 자의식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영국에서도 관련한 논의가 있어서, <가디언>에 짤막한 기사가 실린 적 있다. 이 대담한 시도에 대한 작가의 대답은 "더 직접적이고 현실감 있어 보이게 하려고"였다. 신문에까지 나온 건 예외적이고 혁신적인 실험으로 느껴졌기 때문일 테다.
따옴표의 역사는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독교 사본 작성자들이 중요한 텍스트(성경 구절)가 들어 있는 줄을 표시하려고 사용한 부호(>)에서 비롯했다.
이후 이 부호(>)는 신학 논쟁에서 주로 인용문을 표시할 때 사용했다. 자기 의견과 다른 사람 의견을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구텐베르크 혁명 이후, 인쇄업자들은 인용에 쓰는 > 부호를 쉼표 두 개(,,)로 대체하기 시작했고, 18세기 들어서 소설에서 현재와 같은 형태로 표준화되었다. 다니엘 디포, 헨리 필딩, 새뮤얼 리처드슨 등의 작가들은 소설이란 새로운 문학 형식을 실험하면서 사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따옴표 사용을 주장했다.
서술자가 대신해서 전하는 간접화법을 피하면서, 소설가들은 독자에게 등장인물들의 말을 직접적으로 전달하고 싶어 했다. 직접 화법의 등장은 대화와 서술을 구분할 필요성을 가져왔다.
새뮤얼 리처드슨의 <클라리사>(1748)에는 줄표을 쓰거나 행을 바꾸어서 화자를 구분했으나, 가끔은 인용이 시작되는 지점에 여는 따옴표(“)를 두고, 인용이 끝날 때는 닫는 따옴표(”)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말에는 대체로 쉼표 두 개를 쓰는 관행은 사라지고, 따옴표 표기가 일반화했다.
물론, 그사이에도 제임스 조이스처럼 대화를 연극처럼 배열한 작가들도 있었고, 때때로 단순히 단락 구분만으로 대화를 처리한 새뮤얼 베케트 같은 작가들도 있었다.
<가디언> 기사에 나오는 편집자는 따옴표를 제거하면 더 생생하고 현실적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 생각에, 주관적 느낌일 뿐, 별 근거는 없다. 따옴표가 생겨날 때는 따옴표가 있어야 더 생생하고 현실적으로 느껴진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구병모는 아예 이 문제를 두고 편집자와 주고받은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따옴표라는 귀신>을 쓴 적도 있다. 편집자든, 작가든, 대단히 민감하게 이 문제를 생각한다는 증거다.
편집자 왈, "한 권의 책 안에 실린 여러 편의 소설이 있는데, 어느 편은 인물의 대화가 가운뎃줄이라 부르는 전각 기호로 등장하고, 어디서는 따옴표로 제시되며, 또 다른 데서는 부호 자체가 없이 서로 다른 인물의 목소리가 이어지는데, 이들을 좀 통일을 시도해볼까 말까?"
구병모 답, "그 말을 듣고 원고를 살폈는데, 각각의 단편 안에서는 부호의 쓰임에 나름의 기준과 규칙이 있는 듯했으나, (중략) 책 전체를 보자면 통일성이 없었다. 그래서 표제작을 기준으로 하여 나머지 예닐곱 편의 원고의 형식을 거기다 맞추는 시도를 했다.
현재 시점의 대화는 큰따옴표(“ ”) 인물의 사고 작용은 작은따옴표(‘ ’) 대과거의 대화를 회상할 때 가운뎃줄(—) 초현실적인 상황에서의 목소리나 의식은 부호 없이 해당 주체가 바뀔 적에 행갈이만, 하는 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따옴표를 대체하는 또 다른 인용부호인 꺾쇠(『』 「」)는 일본의 편집 방식이라는 평소의 강박이 있어 고려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통일하고 나니 갑자기 큰따옴표의 분량이 대폭 늘면서, 분명 그전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 부호라는 외피가 추가된 데 불과함에도, 왠지 모르게 소설의 무게가 가벼워지고 인물들의 사고가 튀어 보이는 이상한 일이 생겼다. 한마디로 ‘우아하지 않았다.’
인물의 상상을 감싼 작은따옴표가 무언가를 강조할 때(‘우아하지 않았다’)도 쓰인 작은따옴표와 용법이 뒤섞이는가 하면, 주요 단락이 기억의 회상인지 화자의 망상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되어버리거나, 때로는 그 분간할 수 없음이 주요 목적인 글에서 현실과 상상의 구역을 분리해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결국 각각의 소설을 썼던 당시의 마음이 시켰던 대로 개별 부호를 원래 자리로 돌려놓고 진행한 뒤, 나는 따옴표가 많아진 원고를 마주 대했을 때 느낀 왠지 모를 거부감의 근거를 찾기 위해 다른 작가들의 책을 뒤져보았다. (중략)
[중간에 따옴표 있는 건 없애고, 없는 건 집어넣어 상상한 결과, 뒤죽박죽이라는 예시가 길게 나온다. 한마디로 말하면, 따옴표 없다고 더 우아하고, 따옴표 있다고 더 가볍고 혼란한 건 아닌 듯한데, 왠지 본래 표기대로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그 근거는 모르겠다는 내용이다. ]
글을 쓰기로 작정한 이상 이와 같은 비실용적인 집착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으니, 다만 어디선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동지를 찾아서 한수 가르침을 득하고 싶다. 당신도 나와 같은가. 당신이 어느 글에서 따옴표를 쓰는 이유는 무엇이며 굳이 삭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따옴표 안에는 당신이 생각하기에 어떤 유령이 배회하고 있어, 글을 돋보이게도 하고 없어 보이게도 하는가.
=====
이렇답니다.
규칙에 저항하는 건 작가의 본능이다.
내 생각에 따옴표 유무는 그냥 주관적 느낌일 뿐이지만, 문학 작품에서 그 느낌이나 감각만큼 소중한 게 또 어디 있겠는가.
이 문제는 한국어의 자유 간접 화법 문제하고 연결되어 있어서 만만치 않은 과제이긴 하다. 조만간 시간 나면 한번 제대로 파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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