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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책 세상 소식

르포르타주이면서 어떻게 문학이 될 수 있을까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문학/출판 관련 기사를 챙겨서 읽는다. 오늘 아침에 읽은 기사 중 가장 기억에 남은 건 <동아일보> 박선희 기자가 쓴 김숨 작가의 인터뷰다. 여기에 옮겨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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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 작가는 여러 해에 걸친 교류를 통해 시각장애인들의 삶에 대한 사실적 이해에 공을 들였다. 동시에 이를 점자나 노래, 희곡 등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시적 문장들로 풀어냈다. 

상대를 타자화해 서사의 일부로 활용한 것이 아니라, 대상에 순수하게 몰입한 뒤 새로운 목소리를 불러냈다. 그는 “녹취나 기록을 하지 않는 대신 제 안에서 만들어진 문장에 집중한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선 최선을 다해 ‘들어야’ 한다. 그에게 “듣기는 오랜 문학적 고민이자 주제”다.

“소설가에게 듣기는 지워지고 삭제된 존재, 부정당해 훼손된 존재를 되살려내는 행위 같아요. 맞은편 누군가의 미세한 소리나 몸짓, 속삭임까지 다 알아차리는 이분들이야말로 저에게 듣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준 분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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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선 무엇을 다루었느냐보다 어떻게 다루었느냐가 더 중요하다. 사실, 김숨에 대한 평론들도 대부분 그 내용에 주목할 뿐 방법에 대해서 고민한 건 많지 않다. 

자기 경험에서 출발하는 작가들은 많이 있다. 이것도 잘 쓰려면 언어에 대한 깊은 탐구가 필요하지만, 작가가 그 자폐적 언어에서 멈추는 건 곤란하다. "지워지고 삭제된 존재, 부정당해 훼손된 존재"에 언어를 빌려주는 영매의 일이야말로 한 작가의 언어를 공동체의 언어로 만든다.

아무도 타인이 되는 게 불가능한데, 작가는 삭제된 이들의 존재를 되살리기 위해 입술을 내주어야 한다. 이 불가능한 과업이 어떻게 가능할까를 고민하는 데에서 이른바 '재현의 윤리'가 출발한다. 

르포르타주이면서 어떻게 문학이 될 수 있을까? 기자들이나 르포 작가들과 달리, 김숨은 녹취나 메모를 하지 않는다. 그들의 삶에 대해서 충분히 귀 기울여 듣고 난 후, 자기 안에서 생성되는 문장들을 소설로 옮긴다. 이는 스베틀라나 알렉세이비치의 작업과 아주 다른 방법이다. 위안부, 시각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들의 삶에 문학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김숨이 힘겹고, 또 끈질기게 매달리고 있는 작업들은 언젠가 우리 문학의 큰 자산이 될 것이다.

김숨, 무지개 눈(민음사, 2025)

 

기사 원문은 아래에 링크한다.

 

 

“본다는 것 파고들다보니… 사실은 듣는 것에 가까워”

소설가 김숨은 증언과 문학이 만나는 지점에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일궈온 작가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나 극동 러시아로 강제 이주한 조선인 등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서 기록과 예술의

n.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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