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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절각획선(切角劃線)

한 인문 편집자의 질문

『연구자의 탄생』(돌베개, 2022)을 읽는 중.

이 책에는 익숙한 이름들이 많다.
책이든 글이든,
대개 한 번쯤 읽어본 이름들이다.

이들에게 던져진 질문들은 소중하다.
편집자의 표현을 따라 압축하면,
‘나는 왜 이런 연구를 하고 글을 쓰는가?’

학문 붕괴의 위기에 맞서서
편집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장(場)을 열어서 물음을 던지고,
답을 들어 독자에게 보고하는 일이다.

이 일을 멋지게 수행한
편집자에게 깊은 경의를 표한다.
아울러 어려운 기획에 참여해
학문적 지향을 보여준 연구자들에게도....

책의 내용은 무척 흥미진진하다.
국문학, 영문학, 사회학,
여성학, 인류학, 정보학 등
여러 분야 청년 학자들이
현재의 세상과 학문에 대한
나름의 치열한 고민을 토로한다.

어떤 전선이 짜여가는 모습과 함께
흥미진진한 균열이 엿보인다.

형식상 아쉬운 점도 있다.
편집자의 말 또는 기획의 말이 없어서
책만 읽어서는
이들이 왜, 여기에, 함께 있는지 알기 어렵다.

무엇보다 부제로 정해진 시대 규정,
포스트-포스트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왜 우리 시대를 이렇게 규정하는 게
유의미한 것인지를 짐작할 수 없다.

책은 완전해야 한다.
편집자는 그림자 속에 있어야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전면에 서 있어야 한다.

그리고 보도자료에 썼던
그 치열한 문제의식이 있을 때,
독자들이 더 크게 공감할 것 같다.
재판 때는 같이 읽었으면 좋겠다.

아래 보도자료 첫 문단은
오랜만에 읽은 아름다운 문장이다.
이 책을 기획하고 만든
편집자의 고민이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선명하게 보여 준다.

====

『연구자의 탄생: 포스트-포스트 시대의 지식 생산과 글쓰기』는 40여 년 전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만들어져 학술운동의 일부이기도 했던 한 인문사회 출판사의 편집자로서, 그리고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오랜 독자이자 한 명의 시민으로서 품었던 의문으로부터 시작했다.
인문사회 출판의 역할 중 하나가 학계에서 생산된 지식을 일반 시민들과 연결하고 사회적 담론을 만드는 작업이라고 할 때, 연구자들의 이야기는 왜 과거처럼 힘을 발휘하지 못할까?
여전히 좋은 연구자들이 존재하지만, 왜 기존에 인문·사회과학의 일이었던 것은 문학과 에세이의 몫처럼 보일까?
왜 문학으로부터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를 알고자 하고, 에세이로부터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찾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났을까?
인문·사회과학의 언어, 학계에서 생산되는 지식은 어떻게 ‘사회적으로’ (출판시장에서) 매력적일 수 있을까?
물론 부정적인 대답이라면, 여기에는 ‘인문학의 위기’나 ‘학문공동체의 붕괴’, ‘연구자의 전문화’, ‘학문 후속세대의 재생산 실패’, ‘논문 중심 글쓰기’, ‘성과주의·계량화’ 등 학술장의 변화를 지적하는 말들이 뒤따를 것이다. 이러한 말들은 익숙하다 못해 지루한 기본값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부단하고도 예민하게 ‘사회’와 (활동으로서의) ‘글쓰기’를 동시에 염두에 두면서 2000년대 이후에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공부해온 동시대 젊은 연구자들이 있고, 그들의 가장 날것의 이야기를, 동료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학계 바깥의 시민들도 경청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보고 싶었다.

 

 

김성익, 김신식 외, 『연구자의 탄생』(돌베개,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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