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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책 세상 소식

추천도서는 왜 문학 중심이어야 하나

 

 

 

얼마 전, 영국 《가디언》이 ‘21세기 가장 뛰어난 책’ 100권의 목록을 발표했다. 2009년 맨부커상 수상작인 힐러리 맨틀의 『울프 홀』(사피엔스21)이 1위에 올랐다.

올리버 크롬웰의 일생을 다룬 이 소설은 권력의 무자비한 속성에 대한 뛰어난 탐구이자,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체로 인간성의 심연을 해부한 언어의 혁신이며, 현대 영국(인)의 뿌리를 파고듦으로써 영국적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좋은 작품이다.

뒤를 이은 것은 마릴린 로빈슨의 『길리어드』(마로니에북스), 스베틀라나 알렉세이비치의 『세컨드핸드 타임』(이야기가있는집),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민음사), W.G.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을유문화사), 필립 풀먼의 『황금 나침반』(김영사), 타네하시 코츠의 『세상과 나 사이』(열린책들), 앨리 스미스의 『가을』(민음사), 데이비드 미첼의 『클라우드 아틀라스』(문학동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민음사) 등이다. 10위까지 모두 문학이다.

논픽션으로는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부키)이 13위, 엘리자베스 콜버트의 『여섯 번째 대멸종』(처음북스)이 15위, 나오미 클라인의 『쇼크 독트린』(살림)이 18위,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김영사)가 21위, 앤드류 솔로몬의 『한낮의 우울』(민음사)이 23위에 올랐다.

21세기가 스무 해밖에 지나지 않은 만큼, 때 이른 목록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목록의 책들 중 서가에 있는 책들을 훑어 뽑아서 살펴보았는데, 하나하나 너무나 훌륭한 책이기에 독서를 권장할까 싶어 길게 옮겨 적어 보았다. 목록과 관련해 함께 생각해 볼 만한 지점이 있다.

먼저, 대답부터. 사서 한 분이 페이스북에 이 목록을 공유하면서 몇 권이나 번역되었을지 궁금하다고 했다.

확인해 보니 한국에서 출판되지 않은 책을 세는 게 훨씬 빨랐다. 1990년대 말 편집자 문화가 안정적으로 정착된 이래, 우리 독자들이 읽을 만한 최상급 해외 교양서적이 수년 안에 국내에서 출판되지 않은 경우는 드문 듯하다. 사명감 넘치는 분야별 전문편집자들의 일상이 해외 출판현황을 수시로 조사하고 주요 서적의 출판 가능성을 타진하는 일임을 고려하면 당연하다.

물론 번역에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학술출판의 경우에는 번역을 천시하는 정부와 대학의 형편없는 정책으로 인해 일부 지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나머지 분야에서 주요 서적이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을 가능성은 아주 낮다. 이번 목록만 해도 이름 낯선 작품들 역시 검색하면 이미 한국어판이 나와 있어 편집자로서 무심했다 싶어 부끄러울 정도였다.

다음, 이 목록에서 주목할 부분은 문학작품이 다수라는 점이다. 전체 100권 중 논픽션은 25권 내외에 불과하다. 경제경영・자기계발・실용서적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머지 책은 장편소설・시집・회고록・그래픽노블 등 모두 문학이다. 왜 문학이고, 또 문학이 중심이어야만 할까.

비문학은 독자를 전문가로 만들지만, 문학은 독자를 시민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문학은 우리가 보고 말하고 듣고 느끼는 방식을 정련한다. 우리의 시야를 확장하고, 우리의 감각을 증강하며, 우리의 어휘를 풍요롭게 한다. 또 문학은 타자의 기쁨과 슬픔에 참여하도록 함으로써 우리 경험을 늘리고 감정을 풍부하게 만든다.  

이처럼 문학은 무엇보다 감정교육이다. 나름의 직업적 전문성을 가져야 밥을 벌지만 타자와 감정을 제대로 공유할 수 없다면, 함께 살아갈 수 없다. 아우슈비츠의 아이히만처럼 ‘느낄 수 없는 괴물’, ‘멀쩡한 사이코패스’이니까 말이다. 문학은 특정한 의견이나 입장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자신과 타자와 세상에 대한 감수성을 확장함으로써 우리가 아이히만이 되지 않도록 방부한다. 

게다가 문학 독자는 다른 책도 잘 읽지만, 다른 책 독자는 자기 분야 책만 주로 읽으니, 문학은 진흥하는 것이 곧 독서를 진흥하는 일이기도 하다. 


※ 전체 목록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가디언 21세기 가장 뛰어난 책 100권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