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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절각획선(切角劃線)

절각획선(切角劃線) - 2014년 1월 11일(토)

절각획선(切角劃線)은 책장의 귀를 접고 밑줄을 긋다는 뜻으로 리쩌허우가 쓴 글 제목에서 가져온 말이다. 이는 책의 핵심을 파악하려면 직접 몸을 움직여 체험하고 힘써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말을 읽기의 금언으로 삼아 매일의 기록을 남긴다. 그러고 보면 옛 선인들은 매일 읽은 것을 옮겨 적고, 나중에 이를 모아서 편집하여 하나의 책을 만듦으로써 읽기에 대한 경의를 표함과 동시에 그로써 새로운 지혜를 축적하고 표명했다. 이 기록이 언젠가 그 끝자락에라도 닿기를 바라면서.


(1) 리쩌허우, 『중국철학이 등장할 때가 되었는가?』(이유진 옮김, 글항아리, 2013) 중에서 



― 사상가들과 한 시대에 명성을 떨쳤던 각종 낭만파는, (중략) 독일이 분산되고 낙후되고 연약한 상태에서 통일되고 강대하고 풍족해지는 과정에서 영국과 프랑스로 대표되는 자본 체제와 범용한 세속에 대한 불만과 분노로 인해, 민족문화의 특수성으로 현실생활의 보편성에 대항하고 '초월'하고자 하다가 결국 최후에는 반이성적인 광적인 길을 걸어갔다는 것이다. (중략) 나는 이것이 소홀히 해서는 안 될 독일 사상사의 엄중한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61쪽) 민족문화의 특수성으로 현실생활의 보편성에 대항하는 것, 이 말에 밑줄에 밑줄을 다시 긋고 싶다. 후발 자본주의 국가의 지식인은 이 유혹에 쉽게 굴복한다. 그 결과는 내 생각에 어떠한 경우에도 끔찍한 광기로 귀결된다.

 ― 천박하고 범용하게 보이지만 굉장히 이성적인(reasonable) 영국과 미국의 경험론과 상식 철학을 중시해야 한다. (63쪽) 

 문화대혁명 기간의 여성 지식 청년은 순결한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가장 큰 심신의 피해를 받았거든요. (65쪽)

 선생님은 다들 문학이 사회의 속박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게 걱정스럽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정말로 현실에서 멀어지면 문학은 쇠락한다고 하셨죠. (66쪽)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숙고해 볼 것!!! 그러나 지난 20년의 한국문학이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큰 방향에서 잘못되지는 않은 발언. 사회적 실천과 문학적 실천을 분리하는 이원론으로는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 문학이 상상하는 정서 공간 속에서 사회를 재구축하는 것. 이 부분에 대해서는 깊은 공부가 필요하다.

 구망(求亡)이 계몽(啓蒙)을 압도했다. (70쪽)

 자료를 아주 많이 그리고 자세히 보되, 그걸 사용할 때는 핵심적인 것 몇 가지만 내보이고 결론을 내렸답니다. 중요한 건 통찰력(insight)을 갖고 있었다는 거예요. 식견과 역사를 보는 안목이 있었어요. (72~73쪽) 이 점은 원고를 쓸 때에도, 원고를 읽고 판단할 때에도 아주 중요하다. 편집자로서 이런 식으로 쓰인 글을 만나고 싶다. 요즘에는 이런 글을 읽기가 아주 힘들어졌다.

 문예비평은 주로 감각에 의지해야 합니다. (중략) 평론은 무엇보다도 먼저 감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감각도 없이 개념과 이론만을 끌어다 써서는 안 됩니다. 벨린스키가 다른 사람보다 대단한 점은 감각이 있었다는 거죠. 그는 작품의 풍격과 성질, 작가의 재능과 특징을 날카롭고 정확하게 감지한 데다 설명과 논증을 더해 작가와 독자 모두를 유익하게 해주었답니다. 이게 바로 제대로 된 비평이지요. (80~81쪽) 오늘날 한국의 많은 문학평론가나 편집자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중요한 것은 개념이나 이론이 아니라 감각, 작품의 핵심을 파고드는 통찰력이다. 비평에서 이성이 감각을 압도할 때 작품은 질식한다.

『미의 역정』에 나오는 자료는 전부 기초 자료예요. 저는 핵심 자료는 몇 개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그걸 이용해서 평범한 것도 탁월하게 만들 수가 있지요. 저는 일부러 다들 잘 아는 자료를 이용하려고 해요. 사람들이 마치 옛 친구를 만난 것 같으면서도 뭔가 새로운 느낌을 갖게 하려는 거죠. (83쪽) 이런 것은 대가만이 할 수 있다. 오늘날의 연구는 이런 쪽에서 전혀 반대쪽으로 달려가고 있다. 많은 연구들이 전혀 읽을 게 없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 [유학은] 혈연의 기초 위에서 인간미(사회성)을 지닌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을 핵심으로 삼아 그것을 사방으로 확장함으로써 밖으로는 인도주의와 안으로는 이상적 인격을 이루는 것이야만로 외부에 기대지 않는 실천적 성격을 지닌 심리 모델을 구성했다. (86~87쪽)

― 저는 '덕'이 아니라 '미'야말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해요. (88쪽)

― 모든 것을 문화에 귀속시키는 것은 각 개인을 공격하고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라고요. 더 중요한 원인을 찾아야만 한다고,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94쪽) 이는 문화 연구의 붐 이후 한국 사회에서 비판의 칼날이 무뎌진 듯한 느낌을 받는 것과 혹시 관계 있는 것일까? 문화의 중층성을 생각할 때 무언가 단순해 보이지만 파고들어 생각할 여지가 있다. 제도에 대한 탐구는 인문학의 오랜 과제인데, 최근 나는 이쪽에 상당히 매력을 느끼고 있다. 문학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예제(禮制)의 부재가 오늘날 어쩌면 우리 문학의 위기를 만들어 낸 것인지도 모른다. 

― 표현법은 기교에요. 정치적 억압 아래에 있는 학술은 "지하에서 사고하고 가장자리에서 글을 쓸" 수밖에 없답니다. 규정의 가장자리에서 규정을 위반하지 않는 기술을 단련해야 하지요. (107쪽)


(2) 《기획회의》 359호(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14년 1월 5일) 중에서 



― 정치의 영역에서도 운동의 영역에서도 기존의 대안이 힘을 잃어간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돌파구를 마련할 때다. 상황이 아무리 나빠졌다 하더라도 우리는 주어진 조건 속에서 희망의 경로를 탐색해야 한다.(한윤형, 「2014년에는 ‘안녕’할 수 있을까」) (17쪽) 정치와 운동에 더해서 출판이라는 말도 덧붙이고 싶다. 대안이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한국 출판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동안 미망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이번 호에 함께 실린 원용진 교수의 글 「모바일이 가져온 일상과 문화의 변화」는 플랫폼의 확산이 의미하는 바를 개괄하면서 그 사실을 냉혹하게 설명한다.

― 단순히 장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현재 상황을 진단해 주는 적절한 안내자가 되지 못한다.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 폭풍우가 몰아치는데, 폭풍이 지나가고 많은 시간이 흐르면 바다는 다시 평안해진다는 말만 들려준다면, 경제학자들은 너무나 안이하고 쓸모없는 말만 하는 것이다.(케인즈) (김병권, 「2014년 글로벌 경제위기가 올 것인가」) (30쪽) 출판계에서 오늘날 경영자가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쓸데없는 희망 담론이다. 「화폐 개혁론」에 나왔다는 케인즈의 말을 읽다 보니 곧 실시될지도 모를 도서정가제나 일시적 베스트셀러의 확보는 절대로 자사의 상황을 호전시키지 않는다. 회사를 구원하는 것은 그보다는 자신의 고독 속에서 만들어지는 전략이다. 시장에서 자기 회사나 제품을 다른 회사나 제품과 구별 짓는 본질적인 차이를 수립하는 행위 말이다. 마케팅에 나오는 이 단순한 명제를 깊게 고민하는 것, 이게 불황의 시기를 살아가는 경영자의 고고한 의무다.

― 40대의 변신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 중 하나가 워커홀릭에서 '하비홀릭'으로의 전환이다. (김용섭, 「작은 사치에 빠진 40대, 그들은 지금 행복하고 싶다」) (39쪽) 이는 현상으로서는 정확하지만 심층의 탐구는 부족한 말이다. 우리는 왜 이들이 '하비'에 빠져드는가를 물어야 한다. 취미 인간이란 행복의 추구가 아니라 행복의 전면적 파괴에서 나온 귀결일 것이다. 오늘날 40대가 "매력적인 소비 세력"일 수는 있겠지만, 그리고 그 현상에 주목해야 하겠지만 그것은 어쩌면 좌절의 결과일 뿐이므로 금세 사라질 수도 있다. 

― 재매개는 한 매체가 다른 매체를 실어 나를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TV는 라디오와 신문, 책을 재매개할 수 있다. 그러나 신문이나 책은 라디오, TV를 재매개하기가 어렵다. 플랫폼 중 인쇄 플랫폼은 가장 약한 재매개 능력을 갖춘 탓에 힘없는 서러움을 톡톡히 맛보고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웹과 모바일은 실어나르지 못할 것이 없다. (중략) 온갖 것을 재매개하며 종합적으로 끌어안고, 수용자에게는 멀티태스킹 수용을 누리도록 해준다. 무한한 재매개 능력이 새로운 플랫폼의 인기 배경인 셈이다. (원용진, 「모바일이 가져온 일상과 문화의 변화」) (43쪽)

― 새로운 플랫폼은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많은 캐릭터 요소, '모에'를 제공한다. 데이터베이스화한 캐릭터를 끄집어내 이야기를 만드는 측은 수용자이다. 수용자가 곧 저자인 셈이다. 저자인 수용자는 세계관을 깔고 있는 거대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대신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자잘한 이야기를 만들어 재미를 찾는다.  (원용진, 「모바일이 가져온 일상과 문화의 변화」) (44쪽)

― 시간과 공간의 제한성이 약해지면 시간과 공간에 의해 정해지던 우리의 정체성도 그에 따라 유동적일 수밖에 없다. 지하철에서 화장을 하고, 음식을 먹고, 진한 스킨십을 나누는 것은 과거에 비해 예의가 땅에 떨어졌기 때문에 생긴 결과는 아니다.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 사적 시간과 공적 시간을 휘휘 저어 뒤섞어 놓은 미디어 플랫폼의 경험이 우리의 일상을 바꾸어 놓은 결과인 것이다.  (원용진, 「모바일이 가져온 일상과 문화의 변화」) (45쪽) 

― 글쓰기는 내 삶에서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고 성취감을 안겨 주는 특별한 경험이다. (신순옥, 「남편이라는 것」) (53쪽)

― 모든 산업은 큰 흐름을 제대로 이해하고 대응하는 쪽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한다. 출판도 예외일 수 없다. (류영호, 「스페인, 독일, 러시아, 중국의 전자책 시장에 주목하다」) (67쪽)

― 요새는 이래도 책이 안 팔리고 저래도 안 팔리기 때문에 한 권의 책이 좀 더 높은 완성도를 가지고 만들어야 한다고 봐요. 한 권 한 권의 책들이 이렇게 유통 기한이 짧아지면 안 되잖아요. 각 책의 콘텐츠가 가진 매력들을 극대화해서 생명력이 긴 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봐요.(이기섭) (김류미, 「동네서점의 가능성」) (81~82쪽) 멋진 통찰력이다. 사실 이밖에 별다른 답도 없다. 그러나 책의 긴 생명력이 제품의 완성도에 의해서만 결정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제품력은 점차 중간 표준을 향해 수렴하는 것은 제조업으로서의 출판이라는 한 시대의 종말을 고해 가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가장 뚜렷한 현상이다. 어쩌면 슈타이들 테제라고 불릴 수도 있는 이 정식에 대해서는 깊은 탐구가 필요하다.


(3) 드니 디드로,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김희영 옮김, 민음사, 2013) 중에서  


― 그에게도 당신이나 나처럼 눈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보고 있는지 안 보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자는 것은 아니지만 깨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자신을 존재하게끔 내버려두며 그것이 그의 일상적인 기능이다. (40쪽)  비록 귀족을 대상으로 하지만, 일상성의 지옥에 빠진 현대인을 위한 통렬한 묘사로 읽힌다. 곧이어 디드로는 "자동 인형"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로봇이 없던 시대에 상상해 낸 기계론적 인간에 깜짝 놀랐다.

― 저녁때 내 담뱃갑에 남은 담배는 내 하루 일과의 즐거움에 정비례하거나 또는 권태로움에 반비례한다. (41쪽)

― 우리가 운명을 이끌고 간다고 믿지만, 실은 운명이 우리를 이끌고 가는 것이다. 그리고 자크에게서 운명이란 그에게 다가오거나 그를 건드리는 모든 것이었다. (48쪽) 주제문일까?

― 진실, 진실, 오로지 진실만이 중요하다. 아마도 그대는 진실이란 종종 차디차고 상투적이며 진부하다고 말하겠지. (중략) 진실에는 재미있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며, 재능 있는 작가만이 그걸 포착할 수 있다. (57쪽) 그러고 보면 문학이란 정말 엄중하다. 아래 문장과 이어서 보면 더더욱 그렇다.

― "당신 시는 형편없을 뿐만 아니라 당신이 앞으로도 결코 좋은 시를 쓸 수 없다는 걸 입증해 주었소." "그렇다면 형편없는 시라도 써야 합니다. 저는 쓰지 않고는 못 배깁니다." "지독한 저주를 받았군! 당신이 어떤 전락의 구렁텅이로 떨어지려고 하는지 알기나 하시오? 신도 인간도 기둥도 시인의 저속함은 용서하지 않았소. 호라티우스의 말이오." (58~59쪽)

―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너는 말하고, 나는 들으면 되는 게 아니냐? 이 두 가지가 중요한 게 아니냐? 내게 감사해야 할 텐데 오히려 불평을 하다니. (63쪽) 이 문장은 이야기꾼과 청자, 오늘날 작가와 독자 사이의 관계를 상상해 보는 데 어떤 아이디어를 주는 것 같다.

― 작가여, 제발 좀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말해 달라. 하지만 독자여, 제발 좀, 사람들은 자기가 가는 곳을 안단 말인가? 그리고 그대는 어디로 가는가? (73쪽) "사람들은 자기가 가는 곳을 안단 말인가?" 이 반복되는 질문은 묘한 울림을 준다. 그렇다. 문학이란, 그중에서도 소설이란 어쩌면 자기가 가는 길을 알 수 없을 때 쓰고 읽는 것이다.

― 왜 그는 질문하는가? 좋은 질문이다. 독자여, 그도 당신처럼 배우고 되풀이하기 위해 질문하는 것이다. (74쪽)

― 우리에겐 각자 자기만의 개성이나 관심, 취향, 열정이 있어서 그에 따라 말을 과장하기도 하고 축소하기도 하죠. 있는 그대로 말하라니요! 그런 일은 도시 전체를 뒤져도 아마 하루에 한 번 찾아보기도 힘들걸요. 게다가 듣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보다 사정이 나은가요? 말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이해시키는 일도 도시 전체를 뒤져 하루에 한 번 찾아보기도 힘들걸요. (81~82쪽) 이 해석학적 고민은 디드로의 사상이 사실 얼마나 현대적인지를 보여 준다. 

― 나리, 인생이란 오해의 연속이죠. (82쪽)

― 자크와 주인은 함께 있어야만 가치가 있고 헤어져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9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