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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절각획선(切角劃線)

절각획선(切角劃線) - 2014년 1월 12일(일)

절각획선(切角劃線)은 책장의 귀를 접고 밑줄을 긋다는 뜻으로 리쩌허우가 쓴 글 제목에서 가져온 말이다. 이는 책의 핵심을 파악하려면 직접 몸을 움직여 체험하고 힘써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말을 읽기의 금언으로 삼아 매일의 기록을 남긴다. 그러고 보면 옛 선인들은 매일 읽은 것을 옮겨 적고, 나중에 이를 모아서 편집하여 하나의 책을 만듦으로써 읽기에 대한 경의를 표함과 동시에 그로써 새로운 지혜를 축적하고 표명했다. 이 기록이 언젠가 그 끝자락에라도 닿기를 바라면서.



(1) 드니 디드로,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김희영 옮김, 민음사, 2013) 중에서



― 자연은 너무나 다양하며 특히 인간 본능과 성격에 관해서라면, 자연으로부터 그 관찰과 체험을 취하는 시인의 상상력에서 괴상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97쪽) 이것이 바로 모든 시가 리얼리즘인 이유다. 시는 상상하지 않고, 관찰하고 체험함으로써 현실 그 자체를 창조한다.

― 다른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다. (100쪽)

― 우리 의회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때로 가슴 깊숙이에다 혹은 어깨 위에다 사랑의 표시를 달고 싸우는 작은 경마장에 불과하다. 구경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싸움은 격렬해진다. (102쪽) 그래서 의회는 늘 구경꾼을 불러 모으기 위한 싸움을 벌인다. 공론이라는 이름의 지속적 소음을 발생시킨다. 이것이 의회의 유일한 기능인데, 아이러니인 것은 이 소음 없이 우리는 어떠한 공론에도 이를 수 없다. 거리의 소음이 의회의 소음을 압도할 때를 제외하면 말이다. 

― 철학자란 권세가들에게 무릎을 꿇지 않아 가증스러운 자이고, 직업상 특권 계급의 보호자인 법관들에게는 그들을 고발하는 가증스러운 자이며, 성전 재단 밑에서 그들을 거의 보지 못하는 사제들에게도 가증스러운 자이며, 원칙 없는 인간이자 철학을 예술의 파괴자로 간주하는 시인들에게도 가증스러운 자라네. (109쪽) 요컨대 철학자는 모든 이에게 가차 없는 증오를 가져오는 사람이다. 

― 사람들은 처음에는 운명이 자신을 속인다고 말하지만 두 번째에는 운명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되죠. (112쪽) 

― 푸대접받기를 원치 않는다면 절대로 미리 돈을 내지 마시오. (115쪽)

― 천천히 가는 사람은 안전하다. 안전하게 가는 사람은 멀리 간다. (116쪽)

― 우리는 인생에서 무엇을 슬퍼해야 할지 무엇을 기뻐해야 할지도 모르는 법입니다. 좋은 것은 나쁜 것을, 또 나쁜 것은 좋은 것을 가져오는 법이니까요. (121~122쪽)

― 전 원칙이란 것이 뭔지 잘 모릅니다. 다만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고 내리는 규칙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중략) 모든 설교자들은 우리가 더 나아질 거라고 하면서 그들의 교훈을 실천해 주기를 바라지만 그들 자신은 틀림없이…… 미덕이란…… (중략) 그건 그들이 거기서 이득을 보기 때문이죠. (130쪽) 300년 전에 디드로는 ‘원칙’이라는 말이 사실은 지배자의 규칙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고스란히 폭로했다. 오늘날 온갖 파업에 덧붙이는 ‘원칙’이라는 말도 사실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지배자의 ‘이득’과 연결되어 있다.



(2) 후지타 쇼조, 「신품 문화」, 『정신사적 고찰』(조성은 옮김, 돌베개, 2013) 중에서



― 상상력이 상상력인 까닭은 과거의 것이 아니라 전세의, 미래의 것이 아니라 내세의 모습을 교감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데 있다. 과거의 기억이나 장래의 예측은 그것이 현재로부터 연속되는 계산인 한, 현재태(現在態)로부터의 단절도 비약도 포함하지 않는다. 그러난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건, 어제의 것이라도 그것을 전세, 즉 태고의 ‘기억’으로 상기하는 일이며 내일의 것이라도 그것을 내세, 즉 피안의 예감으로 떠올리는 일이다. 거기에는 끊임없이 이어져 있는 과거와는 달리 ‘몰락’이나 ‘붕괴’나 ‘파탄’이나 ‘발전’ 같은 질적 단절, 즉 역사가 있으며, 예측적 미래와는 달리 ‘초월’이나 ‘비약’이나 ‘도정(道程)’ 등과 같은 질적 격리, 즉 유토피아 혹은 반(反)유토피아가 포함돼 있다. (229쪽) 상상력이란 몰락, 붕괴, 파탄, 발전과 같은 질적 단절이나 초월, 비약, 도정 등과 같은 질적 격리와 관계있는 것이라는 이 생각은 무척이나 흥미롭다. 시를 읽는 데 특히 유용할 것 같다.

― 과거 공공 기관과 사적 경영 양쪽에 걸친 관료제라는 인간 기계가 사회의 기구화와 합리화를 급격히 촉진하기 시작했을 때 그 상태를 일러 ‘이성 없는 합리화’(Rationalisierung ohne Ratio)라고 부른 건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였다. (230쪽) “관료제라는 인간 기계”라는 표현은 무척 재미있는 착목이다. ‘관료라는 인간 기계’로 부르지 않은 것은 왜일까? 단순히 오역일까, 무슨 다른 뜻이 있는 것일까? 어쨌든 ‘이성 없는 합리화’라는 표현은 현대 사회의 본질을 꿰뚫는 힘찬 명명이다. 뒤이어 후지타는 이렇게 말한다. “감금당한 이성은 이성 고유의 풍부함과 가능성과 보편성과 관대함을 잃은 이상 더 이상 이성이 아니다.”(231쪽) 그러나 왜 끝까지 이성이어야 할까? 좀 더 큰 범주에서 사고할 수도 있지 않을까? 차라리 인간다움[人性]이라는 말을 쓸 수도 있지 않을까? 이성주의적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말로 느껴진다.

― 경험의 결정(結晶)은 사물과 교섭하는 개별적 방식에 수반돼 생겨나는 일회적인 고유성을 어딘가에 포함하고 있다. 그것이 상호성의 흔적이며 사회적인 것의 씨앗이다. (233쪽) 이것은 지나치게 벤야민적이다. ‘일회적 고유성’이라는 말은 거의 자동으로 ‘아우라’를 연상시킨다. 제품의 압도적 세계를 단지 경험으로 넘어설 수 있을까? 체험 자체를 식민화하는 자본의 운동을 우리는 보고 있지 않은가?

― 생성 경험과 재생과 부활이 지니는 본래의 새로움은, 오늘에 대한 회의 속에서 어느 정도는 ‘바보’ 같은 질적 소수파(바꾸어 말하자면 정신적 야당성)를 낳는 과정으로서만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234쪽) 



(3) 리쩌허우, 『중국철학이 등장할 때가 되었는가?』(이유진 옮김, 글항아리, 2013)에서



― 인성, 정감, 우연은, 내가 기대하는 철학의 운명이라는 주제다. 이것은 장차 21세기에 시적으로 전개될 것이다. (112쪽)

― 철학은 개념을 제조하고 시각을 제공하지요. (113쪽)

― 꾸미지 않으면 보기에 추악하고, 추악하면 슬프지 않다. (114쪽) 순자의 말이다. 리쩌허우는 서양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동양으로 넘어가는데, 그 움직임이 놀랍도록 자연스럽다. 양쪽을 오랫동안 하나로 고민해 온 덕분일 것이다. 어쨌든 꾸밈에 대한 고민이 요즈음 내가 매일 생각하는 것이다. 문학과 책(그리고 저자)가 사회 속에 적절히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실현 형식, 그러니까 예의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 형태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형태에 활력을 어떻게 불어넣을 것인가? 오늘날 편집자가 가장 고민해야 할 종류이다.

― 현대인은 다양하고 불확정적이며 정말로 많은 온갖 취미와 활동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데요. 허무한 인생에 대한 슬픔과 애착과 미련과 깨달음 속에서 무로부터 유를 만들어 내며 오로지 자기에게 속하는 운명을 파악하고 개척하고 주재해야 하지요. 입명(立命)하는 것이에요. 스스로 내일을 선택하고 결단하면서, 정(情)을 근본으로 이(理)와 욕(慾)을 일체로 녹여 낸 아름다운 세계를 공동으로 창조해 내는 겁니다. (120쪽) 이 구절은 현대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문학 작품 등을 인용해 가면서 조금 쉬운 말로 고쳐 쓰고 싶다. 그러면 강상중의 『살아야 하는 이유』와 같은 어떤 작품이 나올지도 모른다.

― “죽음의 공포, 정욕의 흔들림, 생활의 고뇌, 인생의 번민, 존재의 공허와 싸워 이겨내는 것,” 이 모든 것은 “주체성의 본체 가치”와 관련되어 있다고 하셨어요. (122쪽)

― 이 우연성의 생의 매 순간에 시시각각 관심을 갖고서 이것을 진정 자신의 것으로 변하게 해야 한다. 자유로운 직관에 의한 인식과 창조,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과 결정, 자유로운 향수(享受)에 의한 심미(審美)와 기쁨 속에서 이 개체의 구축에 참여해야 한다. 무수한 개체의 우연성이 분발하여 추구한 이것이 역사성과 필연성을 구성한다. (124쪽) 

― 천천히 걸어요. 감상하면서 말이죠. 살아가는 건 쉽지 않아요. 인생을 음미해야죠. “그땐 그저 일상이라 여겼거늘” 사실은 전혀 평범하지 않은 거랍니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모든 일이 슬프기 짝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을 정감에 녹여 내고 현존재를 충실히 해야지요. 이렇게 해야만 비로소 죽음과 싸워 이길 수 있고, ‘근심’ ‘걱정’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중략) 이 우연들을 음미하고 아끼고 추억하세요. 생의 황당무게함을 슬퍼하며 즐겁게 지내세요. 자신의 정감의 생존을 소중히 여기세요. 인간은 ‘운명을 알 수[知命]’ 있답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고 동물도 아닙니다. ‘무’는 이곳에서 ‘유’가 된답니다. (126쪽) 가슴을 파고드는 극도로 아름다운 문장이다. 서정성과 사변성을 동시에 갖춘, 마치 붓다나 예수의 말씀 같다. 허무에 빠져 있는 모든 이들에게 꼭 읽어 주고 싶은 문장이다.

― ‘공’과 ‘무’를 어떻게 실재의 것으로 바꿀까요? 그건 이 세계로 돌아오는 것, 인정(人情) 속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127쪽)

― 이상한 건, 현대시를 창조한 사람들 가운데 반시(反詩)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없다는 걸세. 오히려 반대로, 보들레르 이래로 시의 모더니즘이 동경해 온 것은 시의 본질에 철저하게 다가가는 것, 시의 가장 심층적 특징에 다가가는 것이었다네. 이런 의미에서 내가 상상하는 현대 소설은 결코 반(反)소설이 아니라 원(原)소설이라네. (밀란 쿤데라) (130쪽) 

― 경험이 선험으로 변하고, 역사가 이성을 건립하고, 심리가 본체로 된다는 것이죠. (1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