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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절각획선(切角劃線)

밑줄들 ― 2013년 7월 31일



오늘은 하루 종일 쌓아 두었던 잡지들을 읽었다. 이응준 소설집 『밤의 첼로』(민음사, 2013)을 막 다 읽어 낸 때였고, 오현종 장편소설 『달고, 차가운』(민음사, 2013)과 《세계의 문학》 가을호에 실릴 최민석 장편소설 「풍(風)의 역사」를 읽으려던 참이었다. 문득, 사무실 탁자 위에 쌓아 둔 신문, 잡지 들이 눈에 밟혔고, 이것들부터 우선 처리하자고 생각했다. 아래는 그 흔적들이다.


박정태의 고전 속 불멸의 문장과 작가」( 《중앙선데이 매거진》 2013년 7월 14일자 28면)를 읽다. 간결하고 재미가 있어서 꼬박꼬박 챙겨 읽는 칼럼이다. 이번에 다룬 작품은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다. 칼럼에 나오는 『토니오 크뢰거』의 구절들.

“당신은 길을 잘못 든 세속인입니다. 길을 잃고 방황하는 세속인인 셈이지요.”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길을 잃고 말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올바른 길이라는 게 이 세상에 없다.”

“저는 두 세계 사이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느 쪽에도 안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견디기가 좀 힘듭니다. 당신들 예술가는 저를 세속인이라 부르고, 세속인은 세속인대로 저를 체포하려고 합니다.”

“리자베타, 나는 더 나은 것을 만들어보겠습니다. 이것은 약속입니다. 저의 가장 깊고 은밀한 애정은 금발과 파란 눈, 아름답고 활발한 사람, 행복하고 사랑스럽고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선량한 것이고 결실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 속에는 동경과 우울한 선망, 그리고 아주 약간의 경멸과 완전하고도 순결한 행복감이 들어 있습니다.”



2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 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어라. (김승옥, 「무진기행」)


글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만나면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없다. 《책&》 6월호에 실린 김연경의 연재 칼럼 「명작의 탄생」에서 옮겨 적다. 이 칼럼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도 다루고 있는데, 아래의 인용문이 아름다웠다.

거울 속 새하얗게 반짝이는 것은 눈[雪]이다. 그 눈 속에 여자의 새빨간 뺨이 떠올라 있다. 뭐라 형용하기 힘든 청결한 아름다움이었다.(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3

남성에게는 복종의 어려움이 있고, 여성에게는 뭔지 모를 결핍이 있다. (자크 라캉)

《책&》 6월호에 실린 신은진의 연재 칼럼 「북 테라피」에서 옮겨 적다. 이 구절이 라캉의 책 중 어디에 나오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구절이 유명해진 것은 김형경 에세이 『천 개의 공감』(사람풍경, 2012)에서 인용된 후 트위터 등을 통해 널리 퍼졌기 때문일 것이다.



4

만약 그 책이 좋은 책이라면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해 생각하게 만들고, 새로운 질문을 하게 만든다면 현실로 돌아왔을 때 우리를 더 강하고 지혜롭게 만들어 줄 것이에요.(카를로 프라베티, 김민숙 옮김, 『책을 처방해 드립니다』(문학동네, 2009))

책은 영화보다 더 융통성 있고, 더 사용자 친화적이다. 전기가 없어도 마음대로 읽을 수 있고, 손가락으로 세상을 조절하며 어디쯤 와 있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루이스 버즈비, 정신아 옮김, 『노란 불빛의 서점』(문학동네, 2009)) 

《책&》 6월호에서 옮겨 적다.



5

소수의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거대한 운동이나 지역 전체의 힘이 필요한 게 아니다. (마이클 무어, 오애리 옮김, 『세상에 부딪쳐라 세상이 답해 줄 때까지』, 교보문고, 2013)

교보문고에서 발행하는 책 소식지 《사람과 책》 6월호의 한 코너 「그녀들의 수다」에서 읽었다. 마카롱 편집실의 우유당이 쓴 글이다. 필명이, 음???



6

《유심》 8월호에 만해대상을 받은 여러 분들의 선정 이유와 수상 소감이 실려 있었다. 그중에서 내 눈을 끈 것은 독일의 소설가 잉고 슐체와 러시아의 시인 콘스탄틴 케드로프의 수상 소감이었다. 둘 다 전문을 옮기고 싶을 만큼 맛 좋은 글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한 소설이 필요하다. 우리 자신 스스로 기차의 창가에 서서 볼 수 없다면, 우리 자신 스스로 우리에 관한 이야기를 이야기할 수 없다면, 우리의 커다란 소망이 이루어진들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잉고 슐체, 「문학은 우리 삶을 가치 있는 여행으로 이끌어」)

1989년 이후 유럽 사람들은 기득권자들이 평등에서, 즉 사회 정의에서 그들을 분리시켜 놓음으로써 자유의 개념을 훼손시켰습니다. (잉고 슐체, 「문학은 우리 삶을 가치 있는 여행으로 이끌어」)

번역자 없이는 우리는 서로를 모를 것입니다. (잉고 슐체, 「문학은 우리 삶을 가치 있는 여행으로 이끌어」)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는 시인입니다. 누구나 살아가고, 숨 쉬고 삶을 향유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시만이 우리에게 이러한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콘스탄틴 케드로프, 「시인은 새로운 의미 발견자이자 창조자」)

우리는 매일 눈으로, 귀로, 그리고 모든 감각으로 자신의 세계를 창조합니다.(콘스탄틴 케드로프, 「시인은 새로운 의미 발견자이자 창조자」)

매일 너의 침묵을 듣는다./ 이 얼마나 이상하게 들리는가/ 눈을 감으니 내 앞에 모든 곳이/ 고요 속에서 탄생한 이 외침이/ 어둠 속에서 탄생한 이 색채가/ 단 한 번도 너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꽃보다 가깝게 태양으로 다가간다/ 불완점함이 느껴지는 모든 곳에서/ 너는 조화로운 세상의 애수처럼 나타난다 (콘스탄틴 케드로프, 「시인은 새로운 의미 발견자이자 창조자」)

모든 문화의 영혼은 바로 '시'입니다.(콘스탄틴 케드로프, 「시인은 새로운 의미 발견자이자 창조자」)

진정 자유에게 조국이 있는가? / 자유는 전 세계의 조국인 것을! / 내게 유일한 자유를 다오 / 자유는 파괴할 수 없으니! (콘스탄틴 케드로프, 「시인은 새로운 의미 발견자이자 창조자」)

주변이 노예로 둘러싸인 상황에서 내가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나 스스로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다른 이들을 자유롭게 할 수는 없습니다. (콘스탄틴 케드로프, 「시인은 새로운 의미 발견자이자 창조자」)

시는 예술 중에서 가장 자유로운 음악이기 때문입니다. 이 음악은 우리의 호흡으로 형상화된 특별한 음악이며 그 호흡은 속일 수 없습니다. 만일 목이 막힌 상태라면 우리는 그 사람이 아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호흡이 자유로울 때 우리는 기쁨을 들을 수 있습니다.(콘스탄틴 케드로프, 「시인은 새로운 의미 발견자이자 창조자」)



6

《유심》의 기획 연재물 「시와 예술의 만남」은 때때로 잊고 있었던 멋진 문장들을 읽는 기쁨을 준다. 이 달에 실린 김창식의 「갈 수 없는 나라의 시와 영화」에는 전설적인 영화에 나왔던 주옥 같은 명대사들을 소개하면서 그들을 시와 연결짓는다. 이 영화들을 다시 보고 싶다. 

“왜 나는 당신이 아니고 나일까? 왜 나는 거기가 아니라 여기에 있는 걸까?”(「베를린 천사의 시」)

이 대사는 영화 시나리오 작업에 뛰어들었던 독일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페터 한트케의 시에서 빌려온 것이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팔을 휘저으며 다녔다/ 시냇물은 하천이 되고/ 하천은 강이 되고 강도/ 바다가 된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질문의 연속이었다/ 왜 나는 나이고 네가 아닐까?/ 왜 난 여기에 있고/ 저기에는 없을까?// 아이가 아이였을 때/ 막대기를 창(槍) 삼아서/ 나무에 던지곤 했는데/ 창은 아직도 꽂혀 있다(페터 한트케, 「유년의 노래」 중에서)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늘 날아다니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 쉰대. 평생 딱 한 번 땅에 내려오는데 그건 죽을 때라지.(왕가위, 「아비정전」)

이 멋진 구절은 영국의 가수 메리앤 페이스풀이 1963년에 발표한 곡에서 온 것이라 한다.

작은 새 한 마리/ 누가 이 세상에 내려보냈나/ 바람결에 태어나 바람결에 잠자며// 하늘색 깃털을 가졌고/ 우아하여 햇살도 그냥 통과해 버려// 누가 이 세상에 내려보냈나// 하늘 높이 날아서/ 사람의 시선에 닿질 않네/ 새가 땅에 내려올 때는 오직 한 번/ 그건 죽으려 할 때(메리앤 페이스풀, 「작은 새(This Little Bird)」)

왕가위 감독의 대표작 「동사서독」은 명대사의 보고이다.

지난 일을 잊을 수 있다면 매일매일이 새로운 시작이 아닐까.

신념을 지키려는 사람의 모습은 때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술과 물의 차이점? 술은 마시면 몸이 달아오르고 물은 마시면 몸이 차가워지지.

검이 빠르면 피가 솟을 때 바람소리처럼 듣기 좋다던데, 내 피로 그 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사랑이란 말을 중시해서 말로 해야 영원함을 알았지만 지금 생각하니 별 차이가 없다. 사랑 역시 변하니까.

인간이 번뇌가 많은 까닭은 기억력 때문이라고 했다. 그해부터 나는 많은 일을 잊고 복사꽃을 좋아한 것만 기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