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요물인기라. 줌치를 열래야 열 줌치가 없대이.”
권영란과 조경국의 『경상의 말들』(유유, 2024)에 나오는 문장이다.
유유 출판사의 문장 시리즈 중 지역 말(사투리)를 펼치는 에세이는 우리말의 사용성을 늘려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편집 구성은 책(주로 문학 작품)에서 지역 말이 쓰인 예를 한 구절 뽑고, 이에 대해 저자들이 짤막한 생각을 펼쳐 가는 형태로 되어 있다.
충남 서부 지역 말과 서울말에만 익숙한 나로선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내 안의 언어 스펙트럼이 약간이라도 늘어난 기분이 들어 신기하다.
위에 소개한 ‘줌치’ 같은 말도 그중 하나다. 처음엔 물고기 이름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허리춤에 차는 ‘주머니 또는 호주머니’를 일컫는 말이었다.
읽고 보니 아주 어렸을 때 이웃 어른이 쓰던 걸 언뜻 들었던 표현인 것 같기도 한 말이다. 편집자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낯선 말이 나오면 일단 사전을 찾아보라고 귀에 인이 배게 들어서, 반사적으로 사전을 찾아 보았다.
흥미롭게도, 이 말이 경상 쪽 말이 아니라, 남원, 순창, 임실 지역에서 쓰는 전라도 말로 되어 있다.
“그럭저럭 짜고 난개 서울 갔떤 님의 중의 적삼을 베고 난개 줌치 한 점이 남았드라요.”(구비문학대계)
“돈 쏟아진다 돈이 쏟아진다/ 한량 줌치서 돈이 쏟아진다/ 한량 주우움 줌치서도 헤헤헤 돈 쏟아지네”(한국민요대전)
조선 중기 문헌인 『계축일기』에도 나온다고 한다.
“줌치란 게 잇난 내인들 일흠 뵈여 채오라.”(주머니는 거기 있는 나인들 이름을 보이고 채워라.)
저자는 이 말을 병원에 입원했다가 곁에 있던 할머니에게서 들었다고 했다. 말이란 게 발 없는 말이라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것이기도 해서 특별한 건 아니다. 어쩌면 이 할머니가 전북 쪽에 어떤 인연이 있어서 입에 붙었을 수도 있고, 경남 쪽에도 ‘개와줌치’(호주머니), ‘줌치끈’염낭끈) 같은 말이 쓰이는 걸로 봐서 이렇게 ‘줌치’가 따로 쓰이는 예가 흔할 수도 있다.
표준어는 내 느낌과 생각을 학교의 틀에 가둔다. 어떤 사물, 어떤 기분, 어떤 생각은 이 틀로는 표현할 수 없다. 그럴 때 지역 말이 그걸 담아내는 수가 있다.
‘지갑을 열다’ 대신 ‘줌치를 열다’라고 써 볼까 하는 충동이 일었다. 어쨌든 새 말을 하나 배웠기에 여기 살짝 적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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