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평론과 서평/절각획선(切角劃線)

(124)
사랑 - 자크 라캉 과일을 향해, 장미를 향해, 순식간에 불붙은 장작을 향해 뻗는 이 손, 가 닿는, 끌어당기는, 북돋는 그것의 손짓은 과일의 농익음, 꽃의 아름다움, 장작의 타오름과 긴밀히 연대한다. 그런데 이 가 닿고, 끌어당기고, 북돋는 움직임으로 손이 그 대상을 향해 상당히 멀리 갔을 때, 과일로부터, 꽃으로부터, 장작으로부터 한 손이 솟아나 당신의 손을 만나려 뻗어온다면, 그리고 이 순간 당신의 손이 충만하게 여문 과일과 활짝 핀 꽃 속에서, 타오르며 파열하는 다른 손 안에서 응고한다면, 자, 여기서 생겨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 이렇답니다.
지는 싸움 지는 싸움을 하는 것은 어리석지만, 바로 지기 때문에 싸워야 할 싸움도 있을 것이다. 세상은 약은 일만 할 수는 없다. 지는 싸움마저 없으면 아예 싸움이 없을 것이다. 싸움이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오지냐? (서정인) 작품과 싸운다는 것은 절망적입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는 그 싸움을 구태여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습니다. ===== 『부사스럽게 부사 사전』(yeondoo, 2021)에 실린 독립 기획자 신이연의 「지는 싸움」에 나오는 말이다. 평생 작품에 매진해 온 노소설가의 삶에 필자가 부친 부사는 ‘굳이’이다. 이 책은 김지은, 신이연, 문광용, 이택광, 이석, 강정화 등 서른 명의 필자가 품사 ‘부사’에 대해 쓴 글을 모아 만든 책이다. 문화평론가, 그림 작가, 북 디자이너, 건축 비평가, 도서관 ..
추첨제 민주주의 추첨은 투표보다 원초적일 뿐만 아니라 더 민주적이다. 민주주의의 핵심인 임의성이다. 누구나 할 수 있으며, 그 누구도 어떤 누구보다 더 큰 정치적 힘이나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또, 민주주의의 핵심은 교체 가능성이다. 위정자를 바꿀 수 있고, 제도를 바꿀 수 있고, 해석을 바꿀 수 있다. 민주주의의 원류 고대 그리스에서는 국정 운영을 맡을 시민들을 추첨제로 뽑았다. 현대 미국 연방 법원의 배심원도 추첨으로 뽑힌다. 자크 랑시에르는 민주주의와 대의제의 위기를 지적하면서 추첨제를 제안했다. 추첨에 의한 정치는 평소 정치의 주체로 호명받지 못한 개인과 집단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문을 여는 하나의 열쇠로 작용할 수 있으며, 이 열림으로 인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후보군 확장의 흐름은 동물 정치에 유리하다. _ 이..
불평등과 특권층 불평등이 적을수록 사람들은 더 관대해지고 불평등이 심할수록 관대함이 사라진다. 마이클 루이스는 말한다. “불평등 자체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불평등은 소수의 특권층에게 화학반응을 일으켜서 그들의 뇌가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한다. 그러면 그들은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게 되고, 품위 있는 시민이 되기 위해 필요한 도덕적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특권층은 거울 속에서 자신의 고귀한 모습을 본다.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시급 14달러를 받고 식료품을 배달하거나 지하철을 청소하는 사람이 그런 경제적 운명을 겪는 게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들은 똑똑하지도 않고, 훌륭하지도 않으며, 자기처럼 가치 있는 사람도 아니라는 것이다. _ 스콧 갤러웨이, 『거대한 가속』, 박선령 옮김(리더스북, 2021..
선거 選 16획 | 선 | 가리다, 갖추어지다 형성. 성부는 巽(손). 손(巽)은 신 앞의 무대에서 두 사람이 나란히 춤추는 모양. 이렇게 신 앞에서 무악을 바치는 것을 찬(撰, 차리다, 뽑다)이라고 한다. 『시경』 「제풍(齊風)/ 의차(猗嗟)」에 “춤을 춘즉 갖추어지다”(舞則選兮)라 하여 갖추어지는 것을 말한다. 두 사람이 갖추어 춤추는 데에서 ‘갖추다’라는 뜻이 되고, 신 앞에서 춤추는 자는 뽑힌 사람이므로 ‘뽑다’라는 뜻이 된다. 신에게 바치는 주식(酒食)을 찬(饌, 차리다, 음식)이라고 한다. 擧 18획 | 거 | 들다, 행하다 회의. 여(與)와 수(手)를 조합한 모양. 여(與)는 여(与, 두 개의 상아를 조합한 모양)를 네 개의 손으로 떠받치는 모양으로, 협력하여 운반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에 또 수(..
고의적 자기 방해 - 마감 때까지 일을 미루는 이유 급해서 허둥지둥할 때까지 꾸물거렸어... 그러다가 오랜 시간 집중해서 쓰고 그렸어. 자주 밤을 새웠고. 물론 이건 고의적인 자기 방해였지. 수준 이하의 작업을 시간이 부족한 탓으로 돌리는 방법. 동시에, 사물들이 신비하게 보이는 초집중 상태를 만들어 냈어. 온 세상, 일상적이고 평범한 물건까지 의미로 반짝였어! 하지만 이렇게 몰아서 일하고 난 뒤에 신경이 너무 활성화된 나머지 잠을 잘 수 없었어. 마침내 잠이 들면 다시 일어나기 쉽지 않았지. _앨리슨 벡델, 『초인적 힘의 비밀』, 안서진 옮김(움직씨, 2021) 중에서 ==== 이렇답니다. 현대 미국을 대표하는 그래픽노블 작가로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으로 잘 알려진 엘리슨 벡델의 신작이 나왔다. 『펀 홈』, 『당신 엄마 맞아?』로 잘 알려진 작가다. 『초인..
성장 마인드라는 허구 과장된 내용의 책은 동료 평가라는 보안관 감시에서 벗어난 서부 개척 시대의 무법천지 상황을 만든다. 심리학 분야는 자기 계발과 인생 조언 분야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돼 있어서 잘못되면 서부 시대 최악의 범죄자처럼 활개 칠 가능성이 커진다. 특히 큰 파장을 일으킨 것이 ‘성장 마인드’ 개념이다. 두뇌 능력은 평생 고정된 것이 아니고 열심히 노력하면 향상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반면 피해야 하는 마음가짐은 자기 능력이 계발될 수 있다는 믿음이 없는 ‘고정 마인드’다. 성장 마인드 개념의 창시자인 스탠퍼드대학교 심리학자 캐럴 드웩의 책 『마인드셋』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그녀는 성장 마인드 개념이 삶을 잠재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사람들을 설득했다. “자신이 택한 관점에 따라 삶의 방식이 지대한 영향을 받..
상처의 독서(황정은) 책 중에 특히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담은 책은 읽는 사람에게 특별한 영향을 미쳐요. 저는 그게 좋습니다. 예컨대 르포 기록 노동자들의 책을 읽는 경험은 세상을 대하는 내 태도를 생각하게 하고 타인을 대하는 마음과 타인의 사정을 생각할 여지를 주기도 해요. 저는 그런 책들의 도움으로 너무 무감한 존재가 되지 않을 수 있었어요. 게다가 고통을 담은 책을 읽을 때 내가 상처받는 이유는 상처 입은 누군가가 이미 있기 때문이니까, 저는 그런 독서에서 발생하는 상처를 감당하고 싶어요. _ 황정은(채널 예스 인터뷰 중에서) ===== 요즘 황정은이 깊게 탐구하고 있던 것은 '상처'의 문제다. 타자의 상처를 피하지 않고 응시했을 때, 자기 안에서 변화하는 것을 성실히 좇고 기록해서 이야기로 만들기. 이는 지극히 염결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