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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절각획선(切角劃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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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과 반응 2012년 5월 31일(목) 고대 중국에서 민(民)이란 글자는 한쪽 눈을 찔러서 상해를 입힌 노예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한다.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고 하지만 역사는 그렇지 않았다. 지배층 인(人)과 피지배층 민(民)은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인’이 사람이었다면 ‘민’은 사람도 아니었다. ― 『저항자들의 책』 누군가의 서평을 읽다가 인용문을 밑줄쳐 두었다. 여기까지 적어 두고 다른 일을 하다가 잊어버리는 바람에 출처를 상실했다. 아마 오마이뉴스에 올라온 서평이었던 것 같다. 사람이란 단수가 아니라 복수이다. 보통선거와 의무교육이 실시된 이후, 그래서 모두가 한 표만큼의 정체성을 갖게 된 이후, 우리는 이 사실을 깜빡 잊어버리곤 한다. 역사는 민(民)이 인(人)으로 바뀌는 기나긴 진보의 길을 걸어왔지만, 그 ..
밑줄과 반응 2012년 5월 29일 (화) 1 기술적 후진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미디어 비즈니스는 기술 비즈니스가 아니다. 그러나 미디어 비즈니스는 특히 기술적 변동에 따라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나는 이른바 유서 깊은 출판사인 파버 앤드 파버(Faber & Faber)를 경영하고 있다. 우리 비즈니스는 대부분 저자로부터 저작권을 사들이고 독자들을 발견하며 저자들을 위한 가치를 창조하는 일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 일을 하는 방법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창업한 이래 80년 동안 우리는 인쇄본(책)을 통해서만 그 일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책, 전자책, 온라인 학습(우리가 직접 구축한 강좌들), 「황무지」 애플리케이션 같은 디지털 출판, 그리고 웹을 통해서 그 일을 할 수 있다. 기술적 변동은 기회를 박탈하는..
밑줄과 반응 2012년 5월 27일(일) 1 삶에 찌들려 정신적 압박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축제를 몰라요. 일하고 먹고 자는 게 그네들의 삶이죠. 사람은 그저 생존 경쟁에서 살아 남아야 하는 존재로만 생각해요. 태어난 것도 축제, 결혼하고 사랑하고 죽는 것도 축제인데 그런 생각을 못해요. 교육이 자연스러움을 제지하고 있어요. 자연스러운 행동을 버릇없다고 하고 예의 없다고 해요. 그래서 부자연스러움이 자연스러움이 되어 버리죠. 마찬가지로 자유롭지 못할 때 부자연스러워지는 거예요. 교보문고에서 발행하는 책 잡지 《사람과 책》 2010년 6월호에 실린(16쪽) 홍신자의 인터뷰를 읽다가 마음에 담아 둔 글이다. 살다 보면 이렇게 오래전 잡지를 청소 등을 하다가 발견해 쭈그려앉아 읽다가 무릎을 치는 경우가 있다. 선(禪)의 화법들을 한없이 동경하면서 동..
밑줄과 반응 2012년 5월 26일( 토) 1 "롤-리-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 리. 타." (『롤리타』(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민음사 펴냄), 15쪽) 활자 유랑자 금정연 씨가 프레시안에 쓴 글 「김수영의 독설 "'목마와 숙녀' 박인환은 양아치!"」에서 마주친 구절. 나보코프는 감각의 천재다. 한 사람의 마음속에 사는 영원한 거주자를 이토록 감각적 표현으로 보여 준 이는 많지 않다. 눈을 감고 가만히 굴려 본다. 내 마음속 그늘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그 수많은 이들의 이름을. 혀끝에 올려서 한 자씩 튀겨 가면서 입술과 혀의 움직임을 생각해 본다. 내 혀끝은 어떤 모양을 그리면서 움직이고 있는가? 문장은 체험과 관찰과 사유를 통해서만 비로소 단련된다. 멋진 구절이다. 롤리타 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