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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절각획선(切角劃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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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밥과 외로움 그동안 스스로 결정해서 혼자 먹는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왜 혼자 밥을 먹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현미밥을 씹듯 오래 곱씹었다. 그러다 결론에 이르렀다. 인간관계에서 추방되어 혼자 먹게 되었다고. 혼자 먹는 일이 자유로운 선택이었다면 다른 사람과 함께 먹겠다는 선택 역시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누군가와 먹고 싶다고 해서 함께 먹을 수 있지 않았다. 혼자 먹는 건 자유라는 이름으로 강제되는데, 홀로 밥 먹는 게 간편하다고 스스로 정당화했다. 인간관계를 상실해서 고독하게 밥 먹고 있다고 자각하는 건 괴로우니까. 이러한 정당화를 간파한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미니마 모랄리아』에서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시장에 종속된 채 고독과 고립에 굴복하도록 강요받는데, 이때 자신의 고립을 자신이 선택한..
풍경과 인간 풍경은 인간보다 오래 지속될 것이다. 이제 풍경은 종으로서의 자신의 미래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풍경을 파괴하는 인간의 소멸을 기다리고 있다. _하이너 뮐러 ===== 이렇답니다.
와인 우리가 하는 식사에 와인을 곁들입니다. 와인에는 많은 것이 포함되지요. 우선 향미가 있습니다. 요리를 보완해주는 풍성한 맛이 있습니다. 또 알코올이 있습니다. 우리의 정신이 살아 있도록 해주는 알코올 말입니다. 와인은 우리가 가진 모든 감각을 풍부하게 해줍니다. 그리고 식사 마지막에는 그라파(포도로 만드는 독한 술)를 마실 겁니다. 그런데 그라파는 한 가지뿐입니다. 알코올뿐이죠. 그라파는 와인을 증류한 것입니다. 인간성에는 많은 것이 포함됩니다. 열정, 호기심, 이성, 이타주의, 창의성, 이기심… 그러나 시장에는 단 하나, 이기심만 있습니다. 시장은 인간성을 증류한 것이지요. 여러분이 할 일은 그라파를 다시 와인으로 돌리는 것, 시장을 다시 인간성으로 돌려놓는 것입니다. 이건 신학의 문제가 아닙니다. 현..
셀라(selah) ​셀라(selah)는 히브리 성서에서 74번 발견된다. 학자들은 그 말이 본문에 등장할 때마다 독자는 읽기를 멈추고 잠시 동안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전 문장이 깊이 되새길 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경전 속의 시는 필연적으로 변화를 의도하며, 옮겨 적은 이는 그 변화가 읽기를 통해 시작되고 동시에 고요한 명상 속에서만 완성될 수 있음을 알았다. 셀라는 히브리 음악에도 나타난다. 합창단 지휘자가 한동안 합창단을 침묵시키는 표시라고 알려져 있다. 악곡 사이에 여백을 두는 것이다. 물론 침묵은 음악이 잦아들 때 존재한다. 셀라는 성스러운 침묵이다. 변혁을 일으키는 말, 음악, 그리고 산부인과 접수원으로부터 대략적인 정보를 얻은 이들이 영원한 변화를 앞두고 겪는 잠깐의 정지 상태이다. 셀..
읽기 ― ​문장(sentence)이라는 단어가 말 그대로 생각의 방법(sententia, 라틴어로 이 말은 생각하는 법을 뜻한다.)이라는 의미임을 감안하면, (중략) 문장은 생각의 기회이자 한계임을 깨닫게 됩니다. 문장으로 생각해야 하고 또 문장 안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뜻에서 그렇습니다. 나아가 그것은 느낄 수 있는 생각이기도 합니다. (중략) 그것은 느껴지는 감각의 양식(pattern)입니다. (웬델 베리). ― ​읽는 동안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가 저자와 더불어 심상을 고동 창조하도록 도움을 준다. (피터 멘델선드)
로마는 세 번 세상을 통일했다 로마는 세계를 세 번 지배했고, 수많은 민족을 세 번 결합하여 통일했다. ​첫째, 로마가 가장 강성했을 때 여러 국가를 통일했다. 둘째, 로마제국이 몰락한 후 교회들을 통일했다. 셋째, 중세에 계승되어 서양 법의 근간을 제공할 로마법 체계를 발전시켰다. 첫 번째는 무력을 이용해서 강제로 한 통일이었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통일은 정신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 로마가 세계사에서 갖는 의미와 사명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민족적 원리를 보편성의 사상에 의해 극복하는 것이다. _루돌프 폰 예링 ​ ==== 정신성, 그러니까 민족적 원리를 보편성의 사상에 의해 극복하는 것, 이게 늘 문제죠. 이 말은 정기문 선생의 쫄깃한 역사 뒷이야기 기행 『역사를 재미난 이야기로 만든 사람들에 대한 역사책』(책과함께, 2019)..
정치철학이 언제나 정치를 이긴다 언젠가 관념 이외에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은 책을 쓴 루소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었지. 그 책의 제2판은 초판을 비웃은 사람들의 가죽으로 제본되어 있었다네. (토머스 칼라일) 데이비드 밀러의 『정치 철학』(이신철 옮김, 교유서가, 2022)에 나오는 말이다. 밀러에 따르면, 정치적 삶에 직접 개입하고자 한 정치철학자들은 대개 실패했다. 아리스토텔레스, 마키아벨리 등 그들은 강력한 통치자에게 조언해 왔다. 그들의 조언은 정치를 실제로 바꿨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았다. 정치철학자들이 정치적 사건에 직접적 영향을 끼치는 바가 드문 이유는 그들이 정치인과 일반 대중 모두가 지니는 관습적 믿음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정치인이든 대중이든 정치 철학자의 말을 싫어한다. 그러나 정치철학이 시간의 흐름과 더..
모래 위에 쓰인 _ 헤르만 헤세 아름답고 매혹적인 것이 단지 한 번의 입김이고 전율일 뿐이라는 것 값지고 황홀한 것이 잠깐의 우아함이라는 것 구름, 꽃, 비눗방울, 불꽃놀이, 아이들의 웃음, 유리 거울 속 여자의 시선 그리고 많은 경이로운 것들 그것들은 발견되자마자 사라진다는 것 단지 한순간 지속될 뿐이라는 것 그저 향기이며 바람의 흩날림일 뿐이라는 것 아, 슬프게도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 (중략) ​ 그래, 지고의 아름다움은 사랑스러움은 쇠락하는 것에 끌린다. 가장 값진 것은 언제든 부서질 수 있다. 음악의 소리, 생겨남과 동시에 이미 떠나가고 사라지는 음악의 소리는 그저 흩날리고 흘러가고 뒤늦게 따라가면서 나직한 애도의 기운에 싸여 있다. (중략) ​ 그런 우리에게는 장미 이파리의 이슬이 한 마리 새의 구애가 구름이 희롱하는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