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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절각획선(切角劃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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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 걸어 맹세하지 마라 네가 내 과거를 망쳐 버려서 미래에 씻어낼 눈물이 한없이 많아. 네가 죽인 부모의 자식들은 살아남아서 마구 보낸 청춘처럼 늙어 가며 탄식하고 네가 죽인 자식들의 부모는 살아서 메마른 고목처럼 늙어 가며 탄식해. 미래에 걸어서 맹세하지 마라. 과거를 망쳤으니 쓰기 전에 망쳤어. _ 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처드 3세」, 『셰익스피어 전집』, 이상섭 옮김(문학과지성사, 2016) ===== 이렇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이상섭 선생님 번역으로 오랜만에 「리처드 3세」를 읽었다. 권력 중독의 상징인 리처드 3세는 척추 측만증의 장애를 안고 태어나 두꺼비, 거미 등의 모멸적 별명으로 불리고 더러운, 추악한, 불쾌한 등의 형용사를 평가어로 달고 살아간다.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채, 피 비린내 나는 장미 전쟁의 와중..
소수 의견 [다수와 소수] 두 의견 가운데 어느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관용되고 나아가 더 격려되고 더 지지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소수의 자리에 있게 된 의견이다. 그것이, 무시된 이익을 당분간 대변할 의견이며, 인간 복리 중에서 그 정당한 몫을 다 받지 못할 위험에 처한 측면을 당분간 대변할 의견이다. 인간 지성의 현 상태에서는 오직 의견의 다양성을 통해서만, 제각각 진리를 담고 있는 모든 측면을 공정하게 다룰 기회가 존재할 수 있다. 어떤 주제에 관해서든 세상의 명백한 만장일치에 대해 예외를 형성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뭔가에 대해 그들이 자기 의견을 말하는 것을 들을 가치는 항상 존재한다. 그들의 침묵에 의해 진리가 뭔가를 잃게 될 가능성도 항상 존재한다. 설령 세상이 올바르다 할지라도..
좋은 정부 정치적 회합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구성원들이 보호되고 번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성원들이 보호되고 번영하고 있음을 알려 주는 가장 확실한 증후는 무엇인가? 그것은 구성원들의 수와 인구다. 그러므로 그토록 논란거리인 좋은 정부의 증후를 다른 데서 찾으려고 하지 말라. 다른 모든 조건이 같다면, 외국에서 들어오는 부, 귀중한 재화, 식민지 없이 시민들이 더 붐비고 증가하는 정부가 틀림없이 더 좋은 정부이며, 인민이 감소하고 쇠약해지는 정부가 더 나쁜 정부다. 계산하는 자들이여, 나머지는 당신의 일이다. 세고, 재고, 비교하라. _ 장자크 루소, 『사회계약론』, 김영욱 옮김(후마니타스, 2018) 중에서 ==== 이렇답니다. 새벽에 이 책을 다시 꺼내 예전에 밑줄 쳐 둔 부분만 잠깐 훑어 읽었다. 일반..
도스토옙스키와 민중의 발견 우리 민족의 가장 숭고하고 단호한 성격의 특징은 정의감과 그것에 대한 갈망이다. 어느 곳에서나,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이 가치가 있건 없건 수탉처럼 달려드는 습성, 이런 결점은 그들에게 없다. 표면에 뒤집어쓰고 있는 껍질을 벗겨 버리고, 아무런 편견 없이 신중하게 그 알맹이만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면 된다. 그러면 민중들에게서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될 것이다. 현자도 민중에게는 가르칠 것이 많지 않다. 단언하건대, 오히려 반대로 현자들 자신이 민중에게서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 ― 표토르 도스토옙스키, 『죽음의 집의 기록』, 이덕형 옮김(열린책들, 2010) 중에서 ==== 죽을 위기를 넘어서서, 또 죽을 정도로 힘들었던 시베리아 감옥 생활에서 도스토옙스키가 발견한 민중의 진실이다. 고통 어린 ..
인간이란 웅성거리는 소리, 시끄러운 소리, 웃음, 욕설, 쇠사슬 소리, 악취, 그을음, 삭발한 머리들, 낙인 찍힌 얼굴들, 남루한 의복, 이 모든 것이 욕설과 혹평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렇다. 인간은 불멸이다! 인간은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존재다. 나는 이것이 인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 표토르 도스토옙스키, 『죽음의 집의 기록』, 이덕형 옮김(열린책들, 2010) 중에서 ===== 이렇답니다.
취소 문화(cancel culture) - 취소 : 자신의 견해와 다른 사람들의 SNS 팔로를 취소하는 데서 연유한 용어.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인신공격이나 불매 운동 등을 통해 상대편을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행위. - 트롤링 : 관심 끌기, 관심 유발, 화나게 하기 등을 일부러 저지르면서 이를 오히려 즐기는 행위. 누군가를 사회적 제물로 삼아서 남의 감정을 일부러 훼손하고 그를 통해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이득을 취하려고 시도하는 것. ----- 발언을 감시하고 공개 모욕을 무기로 삼는 문화 권력을 쥔 쪽은 대개 좌파였다. 2017년 캣 로젠필드는 에 "청소년용 서적이 강력한 소셜미디어 철회, 트롤링 및 연쇄 공격의 표적이 되고 있다."라고 보도했다. 생애 첫 소설을 발표한 한 작가는 실제로 자신의 책을 읽은 적도 없는 온라인 패거리에 스..
생수 1960년대에 플라스틱은 값도 싸고 쉽게 구할 수 있었다. 플라스틱 생산 비용이 크게 낮아져 비닐봉지, 폴리스티렌 컵, 수축 포장되고 사전 포장된 식품 등으로 이루어진 일회용 문화가 뿌리를 내렸다. 풍부하고 값싼 플라스틱이 쓰레기와 쓰레기 매립지 형태로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기까지 20년이 걸렸다. 예컨대 미국의 생수 소비는 1976년에 1인 당 5.7리터에서 2011년에 132리터로 증가했다. 물만 마시기 위해 매년 미국에서 약 500억 개의 플라스틱 병이 생산된다. 재활용 운동은 플라스틱이 우리가 한때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 싸구려가 아니라는 인식에 대한 반응이다. 그것은 직접적 관련 당사자, 즉 생수를 만드는 생산자와 그것을 마시는 소비자들에게는 값싼 자원이지만 오염, 천연..
한 인문 편집자의 질문 『연구자의 탄생』(돌베개, 2022)을 읽는 중. 이 책에는 익숙한 이름들이 많다. 책이든 글이든, 대개 한 번쯤 읽어본 이름들이다. 이들에게 던져진 질문들은 소중하다. 편집자의 표현을 따라 압축하면, ‘나는 왜 이런 연구를 하고 글을 쓰는가?’ 학문 붕괴의 위기에 맞서서 편집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장(場)을 열어서 물음을 던지고, 답을 들어 독자에게 보고하는 일이다. 이 일을 멋지게 수행한 편집자에게 깊은 경의를 표한다. 아울러 어려운 기획에 참여해 학문적 지향을 보여준 연구자들에게도.... 책의 내용은 무척 흥미진진하다. 국문학, 영문학, 사회학, 여성학, 인류학, 정보학 등 여러 분야 청년 학자들이 현재의 세상과 학문에 대한 나름의 치열한 고민을 토로한다. 어떤 전선이 짜여가는 모습과 함께 흥미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