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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절각획선(切角劃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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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보람은 어디에서 생기는가 우리는 보통 반복되는 일을 권태롭게 느낄 것이다. 하지만 세련된 손기술을 익히는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어떤 일을 계속 되풀이하더라도 그 작업이 예측을 동반하는 방식으로 흘러갈 때는 일하는 사람을 고무한다. 똑같이 반복적인 작업이라도 반복의 내용은 새로워지고, 변형이 일어나며, 향상될 수 있다. 하지만 작업자가 느끼는 정서적 보람은 반복적인 일을 다시 하는 바로 그 경험이다. 이러한 경험은 전혀 이상한 게 아니고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것, 바로 리듬인 것이다. 생리적으로 리듬을 타며 수축하는 인간의 심장처럼, 숙달된 장인은 그의 손과 눈을 쓸 때 리듬을 탄다. _ 리처드 세넷, 『장인』, 김홍식 옮김(21세기북스, 2021) 중에서 ===== 이렇답니다. 나날이 새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
문학 번역 발자크, 스탕달, 플로베르, 졸라로 이어지는 사실주의 계열의 소설을 번역할 때 가장 먼저 겪는 어려움은 물리적인 어려움이다. 다시 말해 분량이 방대하기에 상당한 시간적 투자와 함께 특별한 집중력을 요한다. 그런데 방대한 분량의 번역에서 주의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말 실력임이 틀림없다. 번역자에게 풍요로운 어휘 지식, 다채로운 문장 구성력이 없다면, 요컨대 300쪽 이상 길게 쓸 문장력이 없다면 좋은 번역서가 탄생하기 힘들 것이다. 프랑스 번역학자 앙투안 베르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낯선 언어의 시련’ 이상으로 ‘낯익은 언어의 시련’을 이겨내지 않으면 안 된다. _ 유기환, 「문학번역이란 무엇인가?」, 《악스트》 40호(2022년 01/02호) 중에서 ====== 낯익은 언어의 시련..... 깊은 함축..
단어 수집가 녹는점: 시를 쓰며 가장 자주 도달하는 상태. 내게 녹는다는 건 부드러움과 동의어이다. 그리고 이런 문장들. 물속에서 녹고 있는 물고기. 한낮의 태양 아래, 아이스크림보다 먼저 손이 녹아 버린다면? 눈사람에게 허락된 마지막 밤. 흰 사슴의 눈동자가 호수로 변하는 순간. _ 안희연, 『단어의 집』(한겨레출판, 2021) 중에서 ==== 언어의 새로운 가능성을 시험하는 것이 시인의 주요 임무이다. 이 때문에 대다수 시인이 단어 수집가로 살아간다. 시인은 시로 말해야 하므로, 민감하게 단어를 모으고 강박적으로 의미를 되새김하는 이 작업은 일종의 정거장이다. 안희연 시인이 모으고, 다시 뜻을 풀이한 이 사전(私典)은 일찍이 김소연 시인이 『마음 사전』이나 『시옷의 세계』에서 보여 준 단어에 대한 열정만큼 흥미롭..
시간에 대하여 시간은, 본질적으로 기억과 예측으로 만들어진 뇌를 가진 인간이 세상과 상호 작용을 하는 형식이며, 우리 정체성의 원천이다. 그리고 우리의 고통의 원천이기도 하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과거에 혹은 미래에 있지 않다. 지금 여기에, 우리의 기억 속에, 우리의 예측 속에 있다. 우리는 영원불멸을 갈망하고 시간의 흐름에 고통스러워한다. 시간은 고통이다. 이것이 시간이다. 이런 특성이 우리를 매혹하며 안절부절못하게 만든다. (중략) 시간은 세상의 일시적인 구조이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일시적인 변동일 뿐이면서도, 우리를 어떤 존재로 생기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시간으로 만들어진 존재다. 그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고, 우리 자신에게 우리라는 소중한 존재를 선물하고, 모든 고통의 근원인 영..
시간은 사회적 구성물이다 - 1초는 세슘 원자의 진동수(초당 91억 9263만 1770회)에 따라 결정된다. 하루는 지구 자전 운동이 아니라 이 진동수의 규칙적 쌓임으로 정해진다. - 지구 자전 운동은 아주 미세하게 느려진다. 이에 따라 원자초를 세계시의 기준으로 삼은 후 하루가 점점 길어지는 문제가 생겨났다. 그래서 2년마다 1초씩 더하는 윤초가 만들어졌다. -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은 자연의 시간이 아니라 전문가들이 정해서 유포하는 인공 시간이다. - 전 세계 세슘 시계는 약 320개이다. 이 시계들은 나노초 단위에서 서로 다르게 작동한다. 국제 표준시는 그중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마스터시계 50개의 차이를 조정해서 생산한다. 이를 협정 세계시라고 한다. - 정확한 시간은 없다. 평균 시간만 있을 뿐이다. 그것은 국제..
완독가 끝까지 읽는 사람. 무조건 샅샅이 읽는 사람. 완독가는 글자를 읽는다. 단어나 문장이 아닌 글자를. 마침표와 쉼표를 포함해 종이에 배열된 기호를 빠짐없이 읽는다. 모든 기호에 한 번 이상 시선이 닿게 하는 것. 그것이 완독가의 목표다. 완독가는 독서의 즐거움을 구하지 않는다. 유익한 정보를 습득하려 하지도 않는다. 재미라든가 쓸모 같은 것은 완독가의 시야에 없다. 완독가는 완독이라는 행위를 위해 책을 손에 든다. (중략) 완독가는 등반가와 다르다. 차라리 보도블록의 금을 모조리 밟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마음. 그런 마음으로 책에 꽂힌 사람. 완독이 끝나도 성취감이나 희열은 따라오지 않는다. 책을 덮으면 모래벌판 한가운데에 홀로 서 있는 느낌이 든다. _ 신해욱, 『창밖을 본다』(문학과지성사, 2021)..
고전이란 무엇인가 나는 고전을 “인간과 삶, 그리고 세상의 보편적 가치를 대가의 시선으로 해석하고 표현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고전은 텍스트로서의 답을 가르치지도, 요구하지도 않는다.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삶과 세상을 읽어낼 수 있도록 다채로운 시선을 보여줄 뿐이다. 그게 진짜 공부이고, 교육이다. 삶의 강을 건너는 데에 크고 멋진 배가 능사는 아니다. 그런데도 다들 그런 배만 선망한다. 힘들고 매운 삶과 세상의 강을 건너는 나만의 배를 건조할 수 있어야 한다. 고전은 삶의 강을 건너는 나만의 배를 튼튼하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한다. _ 김경집, 『고전, 어떻게 읽을까?』(학교도서관저널, 2016) 중에서
너희가 1980년대를 아느냐고? ‘네가 1980년대를 아냐’고 꾸짖었던 교수에게 돌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 나는 1980년대 초반엔 존재하지 않았고, 중후반에도 그저 생존하는 생물일 뿐이었으나, 그러므로 나는 1980년대를 몸으로 겪어내지 않았으나 그 시절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누구 못지않게 싸우고 있다고. 내 일생의 쟁투는 전부 내가 직접 체험하지 않았던 일들에 닿아 있고, 그것에 부끄러움도 부채 의식도 느끼지 않는다고. 왜냐하면 당신이 살았고 감각했던 1980년대는 당신에게는 지나가 버린 한 시절일 뿐이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자 탐구해야 할 대상이므로. 지금 탐구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당시의 당신에게보다 더 많은 자료가 주어져 있고, 조사와 검수를 통해 숨겨진 사실들이 밝혀진 바 있으며, 그러므로 나의 산문과 역사적 연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