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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절각획선(切角劃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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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언어로 말하기 수십 년 동안 사이비 정치가 사람들의 감수성을 고취함으로써 그들을 오히려 어린애로 만들어 버린 데 대해 ‘성인언어’는 어린애처럼 좋은 생각만을 고집하기보다는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확보하여, 다른 사람이 정말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성인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수준으로 고려하는 언어의 성숙이다. _ 로베르트 팔러, , 이은지 옮김(도서출판 b, 2021) ===== 이렇답니다. 언제부터인지 출판에도 '나'를 주어로 한 책들이 쏟아지는 중이다. '나'의 고통을 전시하고, '나'의 불편함을 표시하고, '나'의 능력을 몰라 준다는 칭얼대는 어린이 같은 호소들...이 대량으로 복제되고 있다. '나'에서 '우리'로 크게 비약하지 못한 문집의 언어들이 여기저기 범람한다. 자기 언어를 타자의 언어로 만들지 못하..
언론, 윤리, 권력 저널리스트가 규범으로 삼고 따르는 것은 공동체의 도덕이나 국익이 아니라 더욱 큰 ‘윤리’이며 자기 내면의 ‘정의’입니다.(이는 ‘사회 정의’와도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이를 ‘공공성’이라 부릅니다. (중략) 서로의 가치관이 대립하는 권력과 미디어의 관계야말로 공동체에는 건전한 형태이며, 개인에게도 자기 자신과 그가 속한 사회를 늘 상대화해서 생각하는 시선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저널리스트는 권력자와 거리를 둬야 합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이지수 옮김(바다출판사, 2021) 중에서 ===== 이렇답니다. 이 책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짤막한 글들과 대담을 모은 에세이집이다. 영화를 통해 억압된 이들의 목소리를 들려 주려고 늘 애썼던 고레에다 감독..
고통에 대하여 고통 그 자체뿐만 아니라, 고통을 계속 생각해야 한다는 것, 괴로움 자체보다도 내가 괴롭다는 사실을 계속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이 고통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_ C. S. 루이스, 『헤아려 본 슬픔』, 강유나 옮김(홍성사, 2019) 중에서 ==== 고통은 단지 신경 물리적 현상이 아니다. 오히려 고통은 심신이 함께 작용하는 인지 문제에 해당한다. 가령, 신체적 고통은 (돈이 없어서) 마음껏 치료받을 수 없다는 정신적 절망 때문에 몇 배로 증폭된다. 대다수 고통에는 진통제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더 이상 고통을 생각하지 않도록, 마음에 평화를 불어넣는 환경 변화가 필요하다.
르네상스와 도서관 르네상스(renaissance)는 프랑스어로 '부활' '재생'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1492년 이후 이탈리아에서 들어왔다. 『서구 예술에서 르네상스와 르네상시스』에서 파노프스키는 리나시타(rinascita)와 리나시멘토(rinascimento)라는 개념에 주목한다. 이탈리아에서 대두된 이 개념은 마니에라 앙카(la maniera antica, 고대 양식)나 테데스카(tedesca, 독일 양식, 고딕적 양식)에 대립되는 부오나 마니에라 모데르나(la buona maniera moderna, 현대 양식)이었다. 네상스(naissance)는 '이 세상에 등장하는', '태어나는'이라는 뜻이다. 접두사 르(re-)는 '반복'의 뜻이다. 따라서 르네상스는 '다시 태어나다' '재생하다'라는 뜻이다. 당시 학자들, ..
출판 창업에 성공하려면 출판 창업에 성공하려면 장기적인 비전부터 정하고 자신이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세분 시장부터 찾아내야 한다. 처음부터 종합선물세트를 만들듯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마구잡이로 책을 펴내서는 살아남기가 어렵다. 한마디로 임팩트 있는 출판사가 되어야 한다. 백화점 옆에 있는 전문점은 살아남지만 잡화점은 버텨내지 못한다. _ 한기호, 「출판 창업에 성공하려면 세분시장부터 정확하게 설정해야 한다」 중에서 ==== 옳은 말씀. 좋은 반복만이 출판을 구원한다. 지난번 플랫폼P에서 발표할 때 주목하는 출판사가 있느냐고 했을 때 봄알람을 예로 이야기했다. 그림책공작소도 멋지다. 더 많은 예를 들 수도 있다. 실패한 책이 성공한 책을 돕지 않는 한, 또 성공한 책이 실패한 책을 돕지 않는 한, 즉 독자와 가치를 공유..
어린이 인물 이야기(위인전)의 역사 인물 이야기는 흔히 위인전이라고 불리며 전집의 형태로 이어져 왔는데, 그 뿌리는 20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20세기 초 등에서 애국 계몽의 의지와 민족 독립의 열망을 담아 인물 이야기를 싣기 시작했다. 일제 강점기 인물 이야기는 을지문덕, 임경업, 곽재우, 김유신 같은 장군과 서화담, 정몽주, 이율곡 같은 학자의 비중이 높다. 이러한 인물 구성은 당시 의 특성과 연결하여 볼 때 무신의 용맹성과 문신의 지혜를 결합하여 조선 민족 고유의 자긍심을 찾아 주려는 까닭이 크다. 이후 20세기 초반 인물 이야기의 인물 구성은 상당수 그대로 이어져 현대 위인 전집에 영향을 미쳤으며 교과서에 나오는 인물과도 상당히 일치한다. 1980년 이후 독재 정권을 통과하면서 인물 이야기에는 저항적 인물이 등장했으며 주로 ..
일본의 대학도서관 사서 나카지마 다케시의 『일본의 내일』(박제이 옮김, 생각의힘, 2020)에 도서관에 대한 이야기가 짧게 나온다. 여기에 소개한다.저자는 도쿄공업대학 소속의 소장 정치학자이다. 학교 이름에서 보듯, 도서관에 인문사회과학 책들이나 시사 관련 잡지들을 제대로 구비했을 가망성은 낮다. 저자 역시 이 책을 쓰면서 염려했던 것 같다.“도쿄공업대학에 부임했을 때에는 도서관에 문과 분야의 도서 및 잡지가 빈약해서, 이걸 가지고 연구할 수 있을까 불안하기도 했다.”하지만 막상 본격적으로 연구에 들어가자, 대학 도서관 사서들이 도움을 주어서 관련 문헌을 수집해 주었다. 저자가 아사히신문사의 웹사이트에 이 책의 주요 내용을 연재했던 만큼, 문헌 수집의 속도가 중요했을 터인데, 사서들은 저자의 불안을 말끔히 씻어 주었다.“전국의..
[사라마구의 말 001] 많은 손은 삶의 명령에 의해 [주제 사라마구의 말 001] 멀리 나아가면 땅은 평평해지다가 손바닥처럼 부드러워진다. 물론 많은 손은, 삶의 명령에 의해, 시간이 지나면서 호미, 작은 낫, 큰 낫의 손잡이 둘레에 좁게 오그라드는 경향이 있지만. _주제 사라마구, 『바닥에서 일어서서』, 정영목 옮김(해냄, 2019) ==== 읽기 시작. 언어는 너무나 자기 중심적이다.비유란 얼마나 조심스러운가.삶은 얼마나 육체를 쉽게 변형시키는가.작품을 읽다가 말고내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이 손은 어느 도구 둘레에 오그라들어 있을까.아마도 빨간 펜이겠지. 『바닥에서 일어서서』는사라마구 문학의 초기 걸작인데,한국어판으로는 가장 늦게 나왔다. 한 가족이 작은 수레에 짐을 싣고고향을 떠나서 이사를 하는 중이다.첫 부분에 나오는,광활한 들판에 가혹하게 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