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직(職)/책 세상 소식

중2병이라는 이름의 폭력에 대한 단상 _오늘의 교육을 읽다가



중2 때는 무엇 하나 집중을 못한다. 특히 누가 있을 때 더욱 힘들다. 예를 들어 책을 읽을 때 집중하면 힘들다. 왜냐? 주변에서 속닥댄다. 심지어 등굣길에 노래 듣기도 힘들다. 이어폰만 꽂으면 중2병이라고 한다. 나는 발라드를 좋아한다.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좋아했다. 이것도 중2병인가? 나도 집에서 놀림 받는다. 여자 친구랑 전화하면 중2병, 노래 들으면 중2병, 책 읽으면 중2병. …… 다들 중2 때의 기억을 잊었나? 

- 204쪽, 「대한민국에서 ‘학생’으로 사는 것」, 박용희 


《오늘의 교육》 29호가 나왔다. 소개글에서 문득 이런 구절과 마주쳤다. 저항의 언어다. ‘중2’를 질병 이름으로 쓰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할 수 없는 폭력이다. 아이들의 신체와 정신에 가하는 훈육을 감추려고 아이들을 질병에 감염된 환자로, 치료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횡포다. ‘중2병’이란 없다. 반항이 있고 탈주가 있을 뿐이다. 자기만의 빛을 내기 위해서 “궤도를 이탈한 별”(햄릿)로서 살아가려는 자유의 몸짓이 있을 뿐이다. 솔직해서 애처롭고 결기가 느껴져 아름다운 글이다. 

사실 이 잡지에 짤막한 서평 하나를 기고했다. 『숲에서 자본주의를 껴안다』(동아시아, 2015)와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더숲, 2014)에 대한 글이다. 제목이 좀 길다. “사람이 돈으로 살아가는 세계로부터 빠져나와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세계로 돌아가려는 이들의 즐거운 분투”다. 꼭 하고 싶은 말이다. 사람-돈-사람이 아니라 사람-사람-사람인 세상이어야 한다.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에 만연해 있는 무능력, 즉 좌절과 필사적으로 싸우는 일이다. 몸을 웅크린 채 쏟아지는 세상의 주먹을 견디면서 내면의 시를 기록하는 일이다.”

누구나 ‘내면의 시’를 기록하면서 살아간다. 편집이란 본래 모든 이가 자기 인생에서 발굴해 기록한 시를 세상에 내보이는 일이 아닐까? 아아,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책 만드는 일은 여기에 어떤 기여를 하는 중일까? 깊게, 길게 물으며 살아가고 싶다. 


--------------------------------------------------

Related Cont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