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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공감과 성찰

[매경칼럼] 스스로 공부하는 인간

“지적 욕구에 불타던 터라 일주일에 한두 번 하는 세미나 수업을 많이 신청했습니다. 그리스어로 플라톤을 읽고, 라틴어로 토마스 아퀴나스를 읽고, 프랑스어로 베르그송을 읽고, 독일어로 비트겐슈타인을 읽었습니다. …… 모두 소수학생만 듣는 수업이어서 결석은 불가능했습니다.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공부만 했던 셈입니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에 나오는 동경대 수업 이야기다. 요즈음 대학을 생각하면 정말 꿈같아 보인다. 이 회고는 학부 수업만으로 다치바나 같은 지적 거인을 어떻게 생겨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고등교육의 목표는 ‘공부한 인간’이 아니라 ‘공부하는 인간’을 기르는 것이다. 대학은 수업료를 내고 강의를 들은 후, 졸업 단추를 누르면 직장이라는 상품이 쏟아지는 자판기가 아니다. 그보다는 세상에 쌓인 지식이나 정보를 이용해서 사회에 필요한 지식을 스스로 생산하는 주체적 인간을 양성하는 최정예 훈련소에 가깝다.

졸업생 대부분이 ‘고독과 자유’를 즐기면서 혼자서 공부할 수 없다면, 그 교육은 완전한 실패로 평가해야 하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 대학의 참담한 실상이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 인문대생이 문헌을 분석하고 판별하고 분류하고 종합할 줄 알고, 사회대생이 조사를 설계하고 수행하며 평가할 줄 알고, 자연대생이 예측하고 실험하고 검증할 줄 안다면, 직업을 얻는 일 따위는 아주 부차적인 일이 된다. 세상이 일자리를 주지 않는다면, 아마도 다치바나처럼 그는 필요한 일을 스스로 창조할 것이다.

시인이란 무엇인가. 학교에서 배운 대로 시 쓰는 사람이 아니라 시 쓰는 법을 새롭게 발명한 사람이다. 경영자는 어떨까. 당연히 학교에서 가르친 대로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은 아니다. 어떤 일도 마찬가지다. 본래부터 대학은 현실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이런 일에는 거의 무력하다.

옥스퍼드대학의 최신 보고서에 따르면, 앞으로 10년 이내에 현존 일자리의 절반가량을 인공지능이 대체할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시대에 대학이 취업 실무를 주로 가르치도록 부추기는 것은 학생한테 몹쓸 짓을 하는 것과 같다. 학생이 세상에 나가 벌이할 일에 대학은 무관심하고 무책임해져도 괜찮다. 그 대신에 대학이 확실하게 책임질 일은 따로 있다. ‘읽기’와 같은 기초 체력을 확실하게 붙여줌으로써 학생들의 주체성을 확실하게 고양해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인간을 길러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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