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잡문(雜文)/공감과 성찰

[책과 미래] 공자, 지식 공유혁명을 시작하다

매일경제 칼럼, 이번에는 지식 공유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실, 세상의 모든 편집자는 소수의 전문가들이 가지고 있는 앎을 세상 모든 이들의 것으로 만드는 일에 복무합니다. 지식의 민주화에 헌신하는 공자의 후예들이라고 할 수 있지요. 지면에 실린 글을 조금 수정해서 올려둡니다. 

====================================


공자, 지식 공유혁명을 시작하다


“앎이란 무엇입니까?”(問知)

공자는 제자들한테서 이 질문을 여러 번 받았다. 주말이면 시골 마을에서 사람들과 함께 『논어』를 읽는다. 어느 날 문득 궁금해졌다. 교육이란 스승은 가르치고 제자는 배우는 일이다. 스승의 가르침 자체가 앎의 실체를 이루니, 제자는 배울 뿐 의문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자주 제자들은 공자에게 이 질문을 던졌을까. 

양자오의 『논어를 읽다』(김택규 옮김, 유유, 2015)에 해답의 실마리가 나온다. 공자 당시에는 스승에게 배우는 일 자체가 아주 낯선 행위였다. 공자 이전의 배움은 주로 부모나 형제자매 같은 친인척들로부터 가전비법의 형태로 지식을 물려받았다. 따라서 지식은 타고난 신분이나 지위에 완전히 예속되어,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집안에서 내려오는 지식 말고 다른 종류의 지식을 배울 길이 없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귀족의 아이는 귀족이, 상인의 아이는 상인이, 장인의 아이는 장인이, 농부의 아이는 농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가는구나, 이와 같이! 밤낮으로 쉬지 않도다.”(逝者如斯夫, 不舍晝夜)

세상을 구할 뜻을 품은 채 노구를 이끌고 천하를 떠돌던 공자는 황하에 이르러 비로소 한 조각 지혜를 얻는다. 강물의 쉼 없는 흐름을 보고, 인간의 유한한 삶을 초월하는 힘을 깨닫는다. 앎을 한 사람의 몸이나 한 집안의 운명에 가두지 않는 법을 발견한 것이다. 신분이나 혈연에 관계 없이 뛰어난 인재를 얻어 가르쳐 제자로 만드는 일, 즉 교육이었다. 

삶의 유한성을 절실하게 깨닫고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야말로 인간을 위대하게 만든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뜻은 크지만 정련되지 못한 청년들, 즉 ‘남의 집 자식들’을 가르칠 결심을 함으로써 공자는 실패한 정치가에서 만세의 스승으로 올라선다. 

그런데 공자의 이러한 행동은 너무나 파격이었기에, 심지어 제자들에게도 좀처럼 이해받지 못한 듯하다. 공자의 제자들은 공자가 따로 아들에게 비결을 전수했으리라 의심하곤 했다. 그래서 『논어』에는 공자의 아들 공리에게 제자들이 이를 몰래 물어보는 장면이 나온다. 당연히 그런 일은 없었다. 하지만 제자들의 이러한 행동은 당시에 지식이 전수되었던 통념적 방식을 잘 보여 준다. 

공자는 지식을 해방했다. 스승-제자 혁명을 일으켰다. 추종자를 제자로 발명하고 자신은 스승이 됨으로써,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 자체를 창조했다. 동시에 그는 배우는 일 자체를 모두에게 개방했다. 사정이 허락하는 최소의 예물을 갖추기만 하면, 신분이나 출신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와서 배울 수 있도록 했다. 

기술의 발달에 따라 무크와 같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선 교육도 가능해졌다. 가치 있는 지식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가르치고, 지식이 필요하면 시공간을 뛰어넘어 누구나 배울 수 있는 각종 플랫폼도 속속 등장 중이다. 공자 당시와 마찬가지로, 일부 전문가들은 이러한 현상의 부작용을 염려한다. 하지만 일체의 장벽을 넘어서서 모든 사람이 앎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공자로부터 시작된 불가역적 과정이다. 지식의 공유는 공자로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이 바로 공자의 진정한 위대함이다. 




Related Cont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