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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소설 / 희곡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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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고전] 인생에 좌절은 있어도 패배는 없다 - 공선옥,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인생에 좌절은 있어도 패배는 없다공선옥, 『내가 가장 예뻤을 때』(문학동네, 2009) 지하철역을 놓쳤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잠시를 못 참고, 또다시 책을 손에 잡은 탓이다. 허둥거리며 약속 장소로 뛰는데, 뒤가 궁금하면서 길 한쪽에 주저앉아 또 읽고 싶다. 처음 접하는 작품도 아닌데, 아무튼 이 지경이다. 이것이 공선옥이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다. 조금도 편한 이야기가 아닌데도, 마음의 장벽을 넘어온 문장들이 잔상을 남기면서 시선을 다음으로, 다음으로 잡아끈다.“이글이글 타오르는 화톳불 위에서 고기가 익어 갔다. 제재소 마당에 유일하게 서 있는 목련나무 고목의 꽃망울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는 봄날 저녁, 그늘이 포근히 내리고 있었다. 그 마당으로 환이 나왔다. 환이 나오자 어두운 마당이..
[21세기 고전] 복종을 금지하고 제멋대로 말하자 - 박형서의 『자정의 픽션』 《경향신문》에 연재하는 21세기 고전. 이번에는 박형서의 ‘침 같은 작품’ 『자정의 픽션』을 다루었습니다. 이 작품, 참 입이 걸죠.^^ 자유롭게 해방된 말들이 넘쳐납니다. 야유와 풍자를 통해 울음을 만드는 기이한 미학이 여기에 있습니다. 복종을 금지하고 제멋대로 말하자박형서, 『자정의 픽션』(문학과지성사, 2006) 박형서는 아주 “막나가는” 작가다. 평론가 김형중의 말이다. 이 평가는 중요하다. 조심하고 절제하는 금욕을 통한 축적은 이 시대의 윤리가 아니다. 미리 쓰고 나중에 갚는 신용 있는 허풍선이야말로 찬양받는 시민의 모델이다. 발끝으로 더듬대고 눈치를 돌리면서 한껏 조심해 봐야 이곳에서 미래라 해 봐야 청년 실업과 중년 해고와 노인 파산으로 이루어졌을 뿐이다. 그러니 카르페 디엠(Carpe Di..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최순덕 성령 충만기』와 새로운 이야기꾼의 탄생 《경향신문》에 연재 중인 ‘21세기 고전’. 이번엔 이기호 소설집 『최순덕 성령 충만기』를 다루었습니다. 이 작가는 화법의 마술사와 같습니다. 다채로운 화법을 통해서 자본주의 아래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지만 전락을 피할 수 없는 우리 삶의 모습을 그야말로 ‘재미나게’ 이야기하는 재능이 있습니다. 이문구, 황석영, 성석제의 뒤를 잇는 이야기꾼의 탄생이라고 불러도 좋겠지요.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최순덕 성령 충만기』와 새로운 이야기꾼의 탄생 한국문학에서 ‘입담’이란 한 소설가가 이룩한 어떤 신화를 상징한다. 황석영, 성석제 등의 이름 앞에 붙은 ‘구라장이’ 또는 ‘이야기꾼’이라는 칭호는 독자 대중의 심장에 열광을 불러일으키는 유혹의 북소리이자, 문장들의 건조한 나열에 불과한 소설에 입말의 생생함을..
[풍월당 문학 강의] 부조리한 이 생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문학은 우리에게 한 번뿐인 인생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아이가 어른이 될 수 없듯이, 문학을 읽지 않으면 삶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요. 한 달에 한 번, 서울 강남 압구정동에 있는 풍월당 아카데미에서 문학의 고전들을 같이 읽고 있습니다. 2015년에 처음으로 시작했으니, 벌써 두 해가 훌쩍 넘었습니다. 올해 초에 『일리아스』, 『오뒷세이아』, 『길가메시 서사시』 등 이야기의 기원에 관한 책들을 같이 읽었고, 이달 4월부터는 새롭게 삶의 부조리 문제를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첫 번째로 고른 작품은 헤밍웨이의 걸작 『노인과 바다』입니다. 이어서 카뮈의 『이방인』, 사르트르의 『구토』,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한 달에 한 작품씩 연속으로 읽을까 합니다. 강..
[21세기 고전] 그래도 사랑은 계속될 것이다 ※ 《경향신문》에 연재 중인 ‘21세기 고전’. 이번애는 이현수의 『신기생뎐』을 다루었습니다. 역사의 밀물에 떠밀리고 있는 근현대사의 잊힌 삶들에 주목하는 이 작가의 성취는 아주 높습니다. 언어의 세밀화가로서 그녀가 그려내는 세계는 정말 풍요롭죠. 이 작품을 비롯하여 『토란』(문이당, 2003), 『나흘』(문학동네, 2013) 등은 독서공동체에서 같이 읽고 이야기하기에 아주 좋습니다. 군산 부용각. 빼어난 노래와 신명나는 춤을 빌미로 여자들이 사랑을 사고파는, 그러다 사랑을 하기도 잃기도 하는 기생집이다. 이현수의 『신기생뎐』의 무대다. 주요 주인공은 넷이다. 소리기생 오 마담, 부엌어멈 타박네, 춤기생 미스 민, 오 마담을 스무 해 동안 외사랑하는 박 기사. 연작소설의 화자를 이루는 사람마다 사연이 절..
[21세기 고전] 어둠을 쌓아 노래를 만들다 _황정은의 『백의 그림자』(민음사, 2010) ※ 《경향신문》에 연재 중인 ‘21세기 고전’. 이번엔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를 다루었습니다. 이 작품이 나왔을 때, 우리는 용산이라는 인세지옥을 함께 목격하고 망연해 있었습니다. 사람이 불꽃 속에서 스러지는 참사를 보았지만, 입술이 얼어붙어 이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견디면서 언어를 보태 연대를 깊게 이루는 의무를 어떻게 다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이때 황정은이 『백의 그림자』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막힌 목을 뚫고, 굳은 혀를 풀고, 닫힌 입술을 열어 주었습니다. 이 책을 만들면서 그 마음을 지켜보았기에, 여기에 기록해 두고 싶었습니다. 어둠을 쌓아 노래를 만들다황정은의 『백의 그림자』(민음사, 2010) 『백의 그림자』와 함께 한국문학은 ‘새로운 세상’과..
[21세기 고전] 망각을 강요하는 권력과 싸우다 _김탁환의 『방각본 살인사건』(민음사) 한 인간의 죽음, 그중에서도 살인을 소설화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 한 작가의 진정한 재능은 심지어 이 주제를 제대로 다룰 줄 아느냐에 달려 있다고까지 할 수 있다. 살인으로 이어지는 연속적 과정의 개연성을 온전히 구축하는 일만 해도 보통 난해한 일은 아니다. 재능 없는 작가들은 서사적 가치가 없는 우발로 처리하거나, 원한과 복수라는 흔해빠진 구조에 호소하거나, 사이코패스 같은 타고난 살인마를 출현시키는 등 삼류의 수법을 통해 살인의 이유를 독자들에게 떠넘기는 지적 태만을 보인다. 물론 그러한 태만에 속아 넘어가는 독자는 사실 거의 없다. 그래서 베스트셀러 등 출판 당시의 사회적 주목 여부와 상관없이, 살인을 그려낸 작품 중에 시간의 시련을 이길 정도로 훌륭한 소설이 거의 드물지도 모른다.현실에서든 이야기..
자유를 향한 무섭고 끔찍한 갈망 _한강의 『채식주의자』(창비)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수상했습니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영예를 안은 한국문학의 쾌거입니다. 예전에 경향신문에 썼던 서평을 블로그로 옮겨서 기념합니다. 자유를 향한 무섭고 끔찍한 갈망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 더 앞으로 갈 수 없다. 가고 싶지 않다.”어느 날, 불쑥, 마음속으로 문장이 일어선다. 아침을 챙기려고 문득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일 수도 있다. 바쁨과 분주함 사이 올려다본 눈으로 파란 하늘이 끼어들었을 때일 수도 있다. 하루를 지내고 노란선 바깥에서 지하철을 멍하니 기다릴 때일 수도 있다. 아무튼, 무조건, 찾아온다. 삶의 의미를 신으로부터, 자연으로부터, 공동체로부터 얻지 못하고 스스로 길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현대인은 인생이 습기를 잃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