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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소설 / 희곡 읽기

[21세기 고전] 망각을 강요하는 권력과 싸우다 _김탁환의 『방각본 살인사건』(민음사)



한 인간의 죽음, 그중에서도 살인을 소설화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 한 작가의 진정한 재능은 심지어 이 주제를 제대로 다룰 줄 아느냐에 달려 있다고까지 할 수 있다. 살인으로 이어지는 연속적 과정의 개연성을 온전히 구축하는 일만 해도 보통 난해한 일은 아니다. 재능 없는 작가들은 서사적 가치가 없는 우발로 처리하거나, 원한과 복수라는 흔해빠진 구조에 호소하거나, 사이코패스 같은 타고난 살인마를 출현시키는 등 삼류의 수법을 통해 살인의 이유를 독자들에게 떠넘기는 지적 태만을 보인다. 물론 그러한 태만에 속아 넘어가는 독자는 사실 거의 없다. 그래서 베스트셀러 등 출판 당시의 사회적 주목 여부와 상관없이, 살인을 그려낸 작품 중에 시간의 시련을 이길 정도로 훌륭한 소설이 거의 드물지도 모른다.

현실에서든 이야기에서든 살인의 실현은 ‘무엇이 인간인가’ 또는 ‘어디까지가 인간인가’라는 질문을 사람들 마음속에 선연히 돋을새김 한다. 따라서 살인의 서사 안에서, 작가는 반드시 ‘인간의 한계’를 획정해 논리적/감각적으로 그에 대한 대답을 제시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인간 실격의 목록에 진지한 한 줄이 추가되거나, 아니면 작가 실격의 이유가 자기 폭로의 형태로 선포되곤 한다.

김탁환의 『방각본 살인사건』은 살인을 둘러싼 역사추리소설의 어리석은 진부함을 넘어선다. 조선의 중흥기인 정조 치세를 배경으로 하고 연암 박지원 주변의 재사들을 지칭하는 백탑파의 삶을 고리로 삼은 후, 한양 도성을 공포와 충격으로 몰아넣는 연쇄살인 사건에 이들을 연루시킨다. 그와 함께 작가는 김진과 이명방이라는 가상의 인물들을 탐정으로 슬쩍 끼어 넣어 역사추리소설의 전형적인 모양새를 완성한다. 

작품의 뼈대를 이루는 연쇄살인은 대담하고 긴박하다. 방각 소설을 읽는 이들이 연속으로 살해당하고, 이들과 친밀히 지내던 홍대용, 백동수, 이덕무 등 백탑 서생들은 사건에 휘말리면서 점차 정치적 좌절의 위기에 빠진다. 그와 동시에 정치적 장의 주변부 인물이었던 이들을 등용해 노론 정권을 뛰어넘는 개혁 정치의 구상을 펼치려는 정조 역시 궁지에 몰린다. 꽃에 미친 천재 김진은 기발한 재주로 사건의 전모를 파헤쳐 노론의 기도를 무너뜨리고, 의금부도사 이명방은 사건의 전말을 기록하여 후세를 기약한다. 하지만 작가가 민감한 더듬이로 건드리려 한 것은, 역사의 고정된 틈을 벌린 후 사건을 삽입함으로써 드러날 살인의 단순한 진실(범인은 누구인가, 왜 살인을 저질렀는가)만은 아니다. 그러했다면 굳이 이토록 전아한 문체와 치밀한 자료는 전혀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노론의 음모는 백일하에 드러나지만 현실을 장악한 그들은 여전히 권력을 누린다. 백탑파는 간신히 함정을 탈출하지만, 그들이 사랑한 소설은 모조리 거두어 불살라진다. 노론과 대립할 때 정조는 백탑파를 총애하지만,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세상을 이야기할 때 정조는 서슴없이 소설의 목을 친다. 개혁 군주란 모순형용일 뿐 현실의 존재는 아니다. 군주는 오직 군주의 편인 까닭이다. 정조의 명령에 의해 방각 소설이 붉게 타올라 재로 스러지는 모습을 보면서, 수많은 이들을 웃고 울게 한 이야기의 영원한 소멸을 보면서, 김진은 타령 한 자락을 쏟아낸다.

“소설이 사라지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리라고 믿는 대신들이 슬프고, 서책을 불태우는 것으로 소설을 없앨 수 있다고 믿는 그분 결정이 슬프다. (중략) 나는 노래하고 싶다. 슬픔이 없다면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슬픔만이 저 하늘과 땅을 덮을 수 있다.”

군주나 대신, 그러니까 권력자들은 소설을 없애면 사람들 마음속에서 슬픔도 사라질 것이라고, 살아가는 고통에 대한 절절한 환기를 금하면 세상의 삐걱거림이 멈추리라고 생각한다. 금서로 차단하고 분서로 틀어막는 야만을, “바른 도리를 가득 담은” 대설(大說)의 이름으로 당당히 행한다. 하지만 이야기가 사라지려면, 먼저 슬픔부터 없어야 한다. 슬픔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야기도 영원히 계속된다. 

당연히 이야기를 팔아 먹고사는 매설(賣說)의 일을 소명 받은 이들 역시 소멸하지 않는다. 소설가 청운몽을 음모로 얽매어 죽일 수는 있으나 “속되고 속된 이야기”가 슬픔으로부터 저절로 생겨나는 것은 아무도 막지 못한다. 사람은 가슴에 슬픔의 구멍이 뚫린 채로는 살지 못하고, 어떤 식으로든 자기 인생의 서사를 (누군가의 힘을 빌려서라도) 이야기로써 회복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방각본 살인사건』에서 작가는 소설가의 운명이 죽이고 불태워 슬픔의 망각을 강요하는 자와 필사적으로 싸우는 일임을 새삼스레 환기한다. 프랑스의 작가 아르토의 말을 빌리자면, “글자를 못 읽는 사람들을 위해서 쓰기, 실어증 환자를 위해서 말하기, 머리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사고하기”일 것이다. 슬픔에 처한 자들에게 망각을 강요하는 권력에 맞서 이야기를 세움으로써 작가는 역사추리의 뻔한 귀결에 문학의 기품을 부여한다. 이러한 작가의 시도는 세월호 사건을 다룬 두 편의 작품 『목격자들』과 『거짓말이다』로까지 분명히 이어진다. 애도 없는 망각이 어찌 있을 수 있으랴. 마음이 바로 선 자를 장부라 하나니, 누가 장부의 마음속에서 그 뜻을 빼앗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