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또 읽다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그 도시의 열흘을 생각하면, 죽음에 가까운 린치를 당하던 사람이 힘을 다해 눈을 뜨는 순간이 떠오른다. 입안에 가득 찬 피와 이빨 조각들을 뱉으며,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올려 상대를 마주 보는 순간,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기억해 내는 순간.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213쪽) 저녁에 노원인생학교 강의를 앞두고 어제 하루 종일 한강의 『소년이 온다』(창비, 2014)를 다시 읽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답답함, 찢어지는 슬픔..
드니 디드로의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김희영 옮김, 민음사, 2013)을 읽다
1마흔이 넘어서야 작품을 비로소 즐길 수 있는 작품이 있다면, 드니 디드로의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김희영 옮김, 민음사, 2013)을 첫손에 꼽고 싶다. 사실 이 작품은 예전에도 읽은 적이 있지만, 그때는 지루하기만 하고 어찌 읽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는데, 이번에 다시 읽으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신비로웠다. 몸속의 시계가 작품의 리듬을 새롭게 일깨우는 기분이랄까, 한 방향으로 계속해서 흐르지 않고 군데군데에서 허리가 부러지고 샛길로 새어 나가면서, 독자와 끊임없이 게임을 벌이는 이 안쓰러운 화자, 그러니까 작가의 이야기 솜씨는 신이 빚은 듯 매끄럽고, 흥미로우며, 풍미가 넘쳤다. 때때로 날카로운 잠언이 깊은 생각을 더해 주고, 때때로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가 마음을 끌어당긴다. 2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