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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3・1운동을 돌아보라

1919년 3월 1일 오후, 전국 일곱 도시에서 동시에 독립선언식이 거행됐다. 이것이 3・1운동의 시작이었다. 이 일을 계기 삼아 한반도 전역에서 시위와 봉기가 한 해 넘게 이어지면서 훗날 독립의 기틀이 되었다. 함석헌은 말했다. “3・1운동 없으면 오늘은 없다.” 민족이든, 국가든, 개인이든, 우리의 현재는 모두 이 운동의 유산이다.

그러나 3・1운동에는 ‘익숙한 무지’가 작용한다. 너무 당연해 더는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은 상태 말이다. 우리 중 대부분은 사실 3・1운동을 잘 모른다. 구체적으로 이 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고, 참여자가 어떤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체제를 꿈꾸었는지 등을 물으면, 대답은 교과서 수준의 일면적 진실을 넘어서지 못한다. ‘장터와 태극기’가 표상하는 ‘낮의 3・1운동’만 알기 때문이다.

권보드래의 『3월 1일의 밤』(돌베개, 2019)은 당대 신문, 잡지, 재판기록, 문학작품, 시각 자료 등을 바탕 삼고, 이 자료들 이면에서 웅성대는 꿈까지 드러내는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3・1운동에 대한 중층적・입체적 접근을 시도한다. 이 운동의 풍요로운 모습을 선언, 대표, 깃발, 만세, 혁명, 평화, 노동자, 여성, 난민 등 16가지 틀을 통해 다채롭게 펼쳐내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3・1운동에는 기미독립선언문에 집약된 이른바 ‘민족 대표 33인’의 목소리만 울려 퍼지진 않았다. 이 운동에 참여/불참했으나, 그 영향과 기억 아래 평생을 살았던 수많은 이들의 목소리도 함께 존재했다. 잊히고 묻힌 이들의 언어도 오랫동안 진실의 입술을 기다려 왔다. 저자는 이들의 3・1운동을 ‘밤의 3・1운동’이라고 부른다.

3・1운동에 참여한 이는 정녕 다양했다. 식민 권력의 통계로만 약 60~100만 명이다. 당시 인구가 약 1600만 명이었으니, 전체의 3.7~6.2퍼센트가 참여했다. 역사상 이만한 참여도를 기록한 사건은 이후에도 없었다. 1960년 4・19혁명도, 1987년 6・10민주화운동도 여기엔 못 미쳤다.

기미독립선언서 낭독과 학생을 동원한 파고다 공원 시위가 발화점이었다. 선언은 언제나 미래를 ‘미리 사는’ 것이므로, 사람들은 그 매혹적인 꿈에 이끌려서 거리에서, 장터에서, 산 위에서 미래를 만끽했다. 특히, 민중들은 낮이 아니라 밤에 더 열심히 일어서 싸웠다. 3월 9일, 10일, 23일 등 대규모 야간 봉기가 대표하는 밤의 3・1운동을 이끈 이들은 주로 노동자와 농민이었다. 한마디로, ‘주경야투(晝耕夜鬪)’였다.

3월 1일 밤에 거리로 나온 서울의 노동자들, 횃불 들고 악대 앞세워 행진했던 평양의 시민들 등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으나, 한밤중 산 위에서 봉홧불 놓고 모여서 만세 부르고, 산 넘어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했던 무명씨들 이야기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민중들에게 3・1운동은 ‘장터와 태극기’만이 아니라 ‘봉화와 야투’로 더 자주 전개되었다. 단 한 번 참여하고 일상으로 돌아갔든, 나중에 만주 등 해외로 나가서 총 들거나 국내에서 지하 독립운동에 헌신했든, 이들은 평생 3・1운동을 살았다. 봉기에 참여하지 않은 채 이들을 망연히 지켜봤던 또 다른 무명씨들도 마찬가지였다. 87년 6월 항쟁을 직간접적으로 겪은 세대가 군부 독재 세력에 동조하거나 화해할 수 없듯, 이들 역시 일제와 근원적 불화 상태로 살아갔다.

저자는 말한다. “3·1 운동을 통해 조선인은 저항하는 존재로서 자존을 형성할 수 있었다. ‘우리’는 단연 일제에 반대했다. 힘이 모자라 짓밟혔을지언정, 그것은 식민지시기 내내, 그러고도 오래 더 살아남은 기억이었다. 3·1 운동이 없었다면 민족으로서의 우리는 거의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3・1운동은 우리에게 ‘존재의 기초’이자 ‘존엄의 이유’를 제공했다.

처음에 지식인들 손에 의해 작성되었던 독립선언서는 방방곡곡 퍼져가면서, 무명의 대표들에 의해 숱하게 축약되고 교정되고 편집되고 변주되어 수많은 꿈을 담아냈다. 조직도, 계획도 없이 시작되고, 분자적・자발적으로 퍼져갔기에 언어에 담긴 꿈들은 통일되거나 통제될 수 없었다. 덕분에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동시에 추구되었다.

봉기한 민중들은 “민족(국가)과 탈민족(국가), 대표-의회 정치와 자치적 질서, 역사-진보와 유토피아적 파국 등”을 함께 이야기했다. 각자 너무나 달라 결국 나중에 “혈전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함께 “북 치고 나팔 불고 노래 부르는” 해방의 축제를 즐기면서, 이들이 “지배와 폭력이 난무하지 않은 평화로운 새 나라”를 꿈꾼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3・1운동은 아직 미완이다. 100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서도 우리는 그 빛나는 가능성을 충분히 탐색하고 실현하지 못했다. 분열과 적대로 미래를 잃어가는 지금, 우리가 무엇보다 우선할 일이 있다. 우리 존재의 기초인 3・1운동을 돌아보라. 민족적 축제의 장이었던 거기에 모든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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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칼럼입니다. 

조금 보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