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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절각획선(切角劃線)

고의적 자기 방해 - 마감 때까지 일을 미루는 이유

급해서 허둥지둥할 때까지 꾸물거렸어... 그러다가 오랜 시간 집중해서 쓰고 그렸어. 자주 밤을 새웠고.

물론 이건 고의적인 자기 방해였지. 수준 이하의 작업을 시간이 부족한 탓으로 돌리는 방법. 

동시에, 사물들이 신비하게 보이는 초집중 상태를 만들어 냈어. 온 세상, 일상적이고 평범한 물건까지 의미로 반짝였어!

하지만 이렇게 몰아서 일하고 난 뒤에 신경이 너무 활성화된 나머지 잠을 잘 수 없었어. 마침내 잠이 들면 다시 일어나기 쉽지 않았지. 

_앨리슨 벡델, 『초인적 힘의 비밀』, 안서진 옮김(움직씨, 202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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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답니다.

현대 미국을 대표하는 그래픽노블 작가로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으로 잘 알려진 엘리슨 벡델의 신작이 나왔다. 『펀 홈』, 『당신 엄마 맞아?』로 잘 알려진 작가다.

『초인적 힘의 비밀』은 “여자아이를 위한 스포츠”가 하나도 없었던 어린 시절부터 환갑에 이른 최근까지 벡델이 했던 달리기, 마라톤, 스키, 하이킹, 등산, 캠핑, 가라테, 피트니스, 요가, 자전거, 스피닝 등 수십 가지 육체 운동을 콜리지, 워즈워스, 케루악, 에머슨, 소로, 마거릿 폴러 등 그녀의 정신 세계에 영향을 끼친 작가들의 삶과 사상을 교차시켜 다룬다. 특히, 선불교에 대한 탐구가 흥미롭다. 

벡델은 말한다. “난 60년간 새로 생겨난 운동이란 운동은 거의 다 해봤어.” 

작품은 강한 몸을 갖고 싶은 열망,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해방되고 싶은 갈망, 공허와 무의미에서 탈출하고 싶은 소망 등 벡델 자신의 내적 경험을 격렬한 육체 운동과 결합해 깊이 파고든다. 

이는 동시에 끝없이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여 초월하려는 기이한 강박에 빠져 있는 현대인 전체의 정신적 상처를 다루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일 중독에 빠져서 허우적대면서 우울증에 시달리는 후반부 벡델의 삶에서 자주 내 얼굴을 발견하고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를 비롯한 다양한 문학 작품들이 인용되면서 이야기 전체를 풍요롭게 만든다. 

운동 강박에 대한 오랜 자기 분석 끝에 벡델은 말한다. 

"리치는 이 세상을 초월하는 것에 대해 쓰지 않았어. 지금 여기,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에 관해 썼지. 체력을 지켜야겠어. 상황이 나빠지면 저항을 돕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니까. 아무도 조그만 할머니는 의심하지 않을 거야."

모두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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